민족시인 이육사 순국 80주년 추모문화제 개최
[프레스아리랑/대구 문해청 기자] 대구이육사기념사업회(정대호 상임대표)는 14일 대구문학관 4층 세미나실에서 민족시인 이육사 순국 80주년 추모문화제를 개최했다.
이날 고경하 사무처장의 사회로 식전행사로 이종일 가수 노래공연, 민족시인 이육사 시인과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김윤현 시인-대금연주, 박정희 전 의원(북구의회)-춤사위, 이유선 시인-시낭송, 심후섭 시인 / 문학박사 / 대구문협회장-추모사, 오말임 전 의원(동구의회)-시낭송 ,발제 - 시로 본 육사의 삶의 자세(철학)-정대호 상임대표의 순으로 진행했다.
심후섭 아동문학가(시인, 문학박사, 대구문인협회 회장)는 "이육사 선생을 추모하는 80주년 추모문학제에 추모사를 하게 되어 영광이다. 대구지역에서 이육사 정신을 개척해 나가는 대구이육사기념사업회 상임대표 정대호 시인 및 문해청 공동대표, 고경하 사무처장을 비롯하여 회원들의 힘찬 정성과 마음에 격려를 보낸다“ 며
“지금 비록 미약하지만 대구지역 이육사 문학흐름에 크게 기여 할 것으로 믿는다. 문협에서도 함께 동참해서 건강한 삶의 문학을 꽃피우도록 노력하겠다"며 추모사를 했다.
이어 신기훈 시인(한국작가회의 대구경북지회 지회장)은 추모사를 통해 "이육사 문학정신이 작가의 정신이다"고 강조하며 "앞으로 대구이육사기념사업회 문학사업에 함께 실천하도록 연대하는 대경작가회의가 되겠다"며 굳건한 결의를 밝혔다.
다음은 발제 전문 시로 읽는 육사의 삶의 자세(철학) -정대호 상임대표 이육사 본명 이원록 李源祿 자는 태경 台卿 이릴 때에는 이원삼 源三 1922년 영천의 백학학원에 다닐 때에도 이원삼이라는 이름을 썼음. 필명은 이활 李活, 대구 이육사 大邱二六四, 육사 陸史, 이육사 李陸史, 육사생 李陸生.
1. 이육사의 연보
1904년 4월 4일 경북 안동에서 출생. 퇴계 이황의 14대손. 원촌 마을에 입향한 이구의 9대손. 6대조 이구운은 문과에 급제해서 형조참판 역임, 고조부 이휘빈은 통덕랑을 지냄.
할아버지 치헌 이중직은 1909년 보문의숙을 만들고 초대 숙장을 지냄. 육사의 집안은 항일의식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하계출신의 예안 의병장을 지낸 이만도는 일제 강점기에 단식하여 순국함. 그의 동생 아들 며느리, 그리고 그의 손자들이 모두 항일투쟁사의 거목이 되었다. 원촌에서도 육사와 그의 형제들이 모두 항일투사로 활동했다. 3.1운동, 6.10 만세 시위, 신사참배반대 운동까지 펼친 인물들이다. 육사의 어머니는 허길, 외할아버지 허형은 의병장으로 유명한 왕산 허위의 사촌이었고 그도 의병장으로 활동했음. 외사촌 허은은 아버지 허발을 따라 만주로 갔다가 임시정부의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며느리가 됨.
육사는 여섯 형제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맏형인 일하 원기, 동생인 수산 원일, 여천 원조(47년 월북 53년 8월 남로당 숙청때 투옥 55년 옥사)가 항일운동가로 유명함. (아우 원창, 원호)
1920년 대구 남산동 622번지로 이사를 가서 온 가족이 초가 삼 칸의 한 집에 살았음.
어릴때에는 조부로부터 한학을 배움, 6살 때 소학을 배움.1935년 일본 경찰에 진술한 종교는 유교로 되어 있음.
1909년 집안에서 보문의숙을 설립, 초대 숙장은 할아버지 치헌 이중직. 이는 1918년 도산공립보통학교로 바뀜. 육사는 도산보통공립학교 1회 졸업생이다. 보문의숙 학생들을 도산공립보통학교 학생으로 편입한 것 같음.
1916년 조부 별세, 가세가 기울어져서 그의 집은 안동군 녹전면 신평리 속칭 듬벌이로 이사. 1920년 도산보통공립학교 1회 졸업이므로 그는 듬벌이에서 보문의숙과 도산보통공립학교를 다닌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음.
1920년 그의 나이 만 16세 원기 원일과 함께 대구로 이사.(온 가족이 대구로 이사한 것 같음) 1930년대 초 경찰 기록에 대구부 남산정 662번지에 사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음.
대구에서 얼마동안 석재 서병오에게서 그림을 배움. 그는 시집 간행을 준비하면서 이육사시고李陸史詩稿라는 제호를 붙인 난초 그림을 그린 것이 전함.
1921년 영천군 화북면 오동리의 대지주 안용락의 딸인 일양과 결혼. 그러나 그는 결혼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음. 부친의 엄명으로 결혼. 일경의 기록에는 자산이 없고 생활이 빈곤함으로 되어 있음. 육사의 집안은 그 지방의 창녕조씨 집안과 통혼관계에 있었음. 육사의 장인 안용락은 집이 부유하여 똑똑한 사위 이육사를 맞을 수 있었음.
육사는 결혼 후 장인이 학무위원으로 있던 영천군 화남면 안천리에 있는 백학학원을 다녔다.
백학학원은 퇴계이황과 그의 제자 황준량을 모신 백학서원의 재산을 바탕으로 면우 곽종석과 회당 장석영의 제자인 창산 조병건에 의해 설립되었다. 육사는 이 학교에서 9개월간 학생들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1921년 처가살이하던 그가 2년간 이 학교를 다녔고 졸업하고 1923년부터 9개월간 교사를 한 것 같음) 영천 백학학원 시절 상투를 잘랐다.
1923년 부모와 형이 살고 있는 대구 남산동으로 합류. 1924년 4월 일본도쿄에 도착하였고 1925년 1월 귀국.(약 9개월간 일본에 유학한 셈) 일본에서 동경정칙예비교와 일본대학문과전문부에 다니다가 병으로 퇴학하였다는 일본 기록도 있고 신문조서에서 간다구 금성예비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재학하였다는 진술도 있음. 또다른 정보자료에는 일본대학 중퇴라는 기록도 있음. 김태엽은 그 당시 이육사가 일본에서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우회 회원이었다고 함. 1925년 1월 일본에서 귀국. 1922년 대구 부호 서상일이 조양회관을 준공하였다. 이 건물에는 1,0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대강당이 있었다. 1927년 신간회 대구지회도 여기에 있었음. 육사는 1925년부터 다음 해까지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했음. 1925년부터 그는 독립운동에 발길을 내딛게 된다. 그는 이 무렵 이정기와 북경을 다녀오고 난 뒤 본격적인 민족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음.
1927년 장진홍의사 거사 사건으로 검거되었다. 1년 7개월 수감생활을 하였다. (1927년 10월 18일 11시 50분 조선은행 대구지점, 대구 중앙로에 있음, 신문지에 쌓인 폭탄이 배달. 직원이 놀라 길거리에 내어 놓았는데 폭탄이 작렬. 일본경찰과 은행원 5명이 중상. 은행의 유리창 70여장이 깨졌음. 장진홍은 변장을 하고 일본 오사카로 잠적. 이육사는 형 원기 동생 원일, 원조와 함께 구속. 1년 4개월 뒤 장진홍은 1929년 2월 14일 일본 오사카에서 구속. 그후 3개월 후 1929년 5월에 육사는 감옥에서 나옴.) 예심결정서에서 육사는 1926년 봄에 이정기와 북경을 다녀왔고 이정기를 중심으로 비밀결사에 참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이정기는 성주 출신이고 최연소 파리장서 서명자로 기록되어 있음) 1926년 12월 28일 나석주는 의열투쟁으로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지고 경찰들과 시가전을 벌이다가 장열하게 자결함. 1934년 신문조서에는 1925년 8월 무렵 중국으로 건너가서 북경에 있는 중국대학 사회학과를 다녔다는 기록이 있음.
1929년 5월 1년 7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나와서 중외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활동. 조선일보에 첫 시 <말>이 1930년 1월에 게재. 1931년 8월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김.
1930년 10월에 <<별건곤>>에 <대구사회운동단체개관>을 발표. 대구청년동맹, 대구소년동맹, 신간회대구지회, 근우회대구지회, 경북형평사대구지사, 경북청년동맹 등 대구지역 사회운동단체의 현황을 조사하고 분석한 것이다. 필명으로 이활李活 대구이육사大邱二六四를 사용함.
1931년 1월 대구격문사건으로 개월 구금되다. 석방된 이후 중국에 드나들면서 윤세주를 만나다.
1931년 8월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기다. 육사는 구속과 피신을 거듭했지만 동료기자 이선장이 언제나 지국에서 일하도록 배려했다고 함.
1932년 4월 봉천으로 가서 윤세주를 만나다. 당시 윤세주는 군사간부학교 입교생을 모집하고 있었음. 북경을 거쳐 9월 20일쯤 난징으로 가다. 거기서 루쉰을 만나다.
육사의 처남 안병철을 1908년생으로 경북 영천군 지곡면 (현 화북면) 오동 1139번지 출신. 1932년 봉천을 거쳐 8월에 난징으로 가서 군사간부학교 1기생으로 입교.
1932년 육사는 북경에서 윤세주 외에도 안동 풍산 출신의 김시현을 만나다.
1932년 의열단은 난징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열다. 1932년 10월부터 1935년 9월에 이르는 3년여 동안 군사간부학교를 열다. 1기 26명, 2기 55명, 3기 44명, 모두 125명을 양성. 간부학교설립의 궁극적인 목표는 ‘한국의 절대독립’과 ‘만주국의 탈환’이었다.
1932년 9월 난징에 도착한 육사는 김원봉을 만나다. 윤세주 김시현 이범석이 김원봉을 안내해 왔다.
1932년 의열단에서 수립한 조선혁명정치군사간부학교 제 1기생으로 26명 가운데 한 명으로 입교. 교육내용은 정치 군사 실습과목으로 구성됨. 육사는 권총 사격에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는 말이 전한다. 의열단에 가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윤세주에게 김원봉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털어놓은 적이 있다고 함. 부르주아 계급을 바탕으로 삼은 중국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는 점을 지적하고 “중국의 부르주아계급과 야합”하고 있다면서 “사상이 애매하여 비계급적이다”라고 비판했다고 함.
1934년 4월 20일에 졸업. 1기생 26명 전원이 졸업. 저녁에 3편의 연극 공연이 있었는데 육사의 작품 <지하실>도 있었음.
1기 졸업생의 개별면담에서 김원봉은 의열단의 기본적인 투쟁방향인 만주지역 파견을 피력함.
1기 졸업생에게 주어진 임무의 핵심은 만주지역 파견요원이 되는 것과 2기 교육생을 위한 교관요원으로 남는 것 두 가지가 주종을 이루었다. 육사는 김원봉의 설득에도 귀국방침을 고집. 육사는 김원봉에게 조선독립을 위해서는 조선으로 돌아가서 노동자 농민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여야 한다고 주장.
1934년 3월 20일 조선일보사 대구지국 특파원으로 일자리를 구하다.
1934년 3월 22일 일경에 체포. 6월 기소유예의견으로 석방. 1933년 11ㅇ월 15일 처남 안병철이 군사간부학교 훈련에 대해 봉천의 신경헌병대에 자수. 그로 인해 1934년 6월부터 10월 사이에 1기생 7명, 2기생 14명이 체포되거나 자수함. 이로 인해 육사는 처가를 무척 원망함. 부인과의 사이도 나빠짐.
1935년 봄 위당 정인보의 집에서 신석초를 만나다. 가까운 사이로 발전. 위당이 다산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활동함. 이 일로 신조선사와 인연을 맺음.
1935년 6월에 <<신조선>>에 <춘수삼제春愁三題>를 발표. 그해 5월에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
1935년 12월에 <<신조선>>에 <황혼>을 발표.
1936년 1주일 동안 서대문 형무소에 묶이는 몸이 되다. 만주에 가서 조선일보 대구지국 동료인 이선장을 몽양 여운형과 일헌 허규에게 돌아왔는데 그것이 이유인 것 같다. 11월 18일 어머니의 회갑연을 대구에서 열다.
1936년 7월 몸이 쇠약해져서 동해 송도원으로 가서 요양하였다고 전한다.
1937년 어머니, 동생 원일과 같이 서울 명륜동(명륜정 3정목 57의 3호)으로 옮겨 생활하다. 1938년 11월에 아버지의 회감연을 열다.
1939년 종암동 62번지로 이사하다. 8월에 <<문장>>지에 <청포도>를 발표하다. 이 시절 말술을 마시다. 신석초는 그를 ‘대주호’라고 표현했다. 1941년 1월에 <<문장>>지에 <절정>을 발표하다. 이 무렵 아내와 사이가 좋아지다. 2월 딸 옥비가 태어나다. 폐질환으로 성모병원에 입원하다. 같은 해에 부친상을 당하다. 1942년 경주 현내면 기계리의 이영우의 집과 서울의 이태성의 집에서 번갈아 지내다. 그해 7월 경주 옥룡암에서 용양에 들어갔다.
1943년 4월에 다시 북경으로 가다. 43년 신정 때 신석초를 만나 북경으로 가겠다고 했다. 1943년 7월에 모친과 맏형의 소상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 안동 원촌마을에도 들리고 풍산에서 권씨 집에서 일박하고 상경한 뒤 늦가을 동대문 형사대와 헌병대에 검거되다. 그의 아내 안일양은 6월(음력), 아마 7월에 동대문 경찰서에서 마지막으로 육사를 보았다고 한다. 20여일 구금되어 있다가 북경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이병희의 기록에는 초겨울에 체포되었다고 한다.
1944년 1월 16일 중국 북경의 감옥에서 순국하다. 1월 25일 아우 원창이 육사의 화장한 유골을 이병희에게서 인도받다.(음력으로 섣달 그믐). 이 날은 이병희가 혼인하기로 약정한 날이다.
2. 시로 읽는 육사의 삶의 자세(철학) 1) 역사의식을 가지고 살자.
광야(曠野)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든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고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육사시집, 1946년, 서울출판사)
꽃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나리잖는 그 땅에도 오히려 꽃은 발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움작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여
한바다 복판 용솟음 치는 곳 바람결따라 타오르는 꽃성에는 나비처럼 취하는 회상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보노라.
(육사시집, 1946, 서울출판사)
2) 힘들어도 피하지 않는다
절정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문장,1940년 1월호)
수필 <계절의 오행> 중에서
시인의 감정이란 얼마나 빠르고 복잡하다는 것을 세상치들은 모르는 것뿐이오. 내가 들개에게 길을 비켜줄 수 있는 겸양을 보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정면으로 달려드는 표범을 겁내서는 한 발자욱이라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내 길을 사랑할 뿐이오. 그렇소이다. 내 길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은 내 자신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노력이오. 이래서 나는 내 기백을 키우고 길러서 금강심에선 나오는 내 시를 쓸지언정 유언은 쓰지 않겠소. 그래서 시를 쓰지 못하면 죽어 화석이 되어 내가 묻힌 척토를 향기롭게 못한다곤들 누가 말하리오.
(조선일보, 1938년 12월 24~28일)
정지용의 장수산
장수산長壽山
벌목정정伐木丁丁이랬거니, 아름드리 큰 솔이 베어질 듯고 하이, 골을 울어 메아리 소리 찌르릉 돌아올 듯도 하이, 다람쥐도 좇지 않고 멧새도 울지 않아, 깊은 산의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종이보다 희구나! 달도 보름을 기다려 흰 뜻은 한밤 이 골을 걸음이랸다? 웃절 중이 여섯 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라간 뒤 조찰히 늙은 사나이의 남긴 냄새를 줍는다,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니, 오오 견디란다, 차고 올연兀然히 슬픔도 꿈도 없이, 장수산長壽山 속 겨울 한밤 내…‥
(문장, 2호 1939년 3월호)
이상의 오감도 오감도烏瞰圖
13인의아해가도로를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다른사정은업슨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를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조선중앙일보, 1934년 7월 24일)
노정기路程記
목숨이란 마치 깨어진 뱃쪼각 여기저기 흩어져 마을이 구죽죽한 어촌보담 어설프고 삶의 틔끌만 오래묵은 포범布帆처럼 달아매였다
남들은 기뻤다는 젊은 날이었건만 밤마다 내 꿈은 서해를 밀항密航하는 짱크와 같애 소금에 절고 호수湖水에 부프러 올랐다.
항시 흐렸한 밤 암초를 벗어나면 태풍과 싸워가고 전설에 읽어본 산호초는 구경도 못하는 그 곳은 남십자성도 비쳐주도 않았다
쫓기는 마음 지친 몸이길레 그리운 지평선을 한숨에 기어오르면 시궁치는 열대식물처럼 발목을 오여쌌다
새벽 밀물에 밀려온 거미이냐 다 삭아빠진 소라껍질에 나는 붙어왔다 먼-ㄴ 항구의 노정에 흘러간 생활을 드려다 보며
(자오선, 1937년 12월)
자야곡子夜曲
수만호 빛이래야 할 내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우에 이끼만 푸르러라
슬픔도 자랑도 집어삼키는 검은 꿈 파이프엔 조용히 타오르는 꽃불도 향기론데 연기는 돛대처럼 내려 항구에 들고 옛날의 들창마다 눈동자엔 짜운 소금이 저려
바람 불고 눈보래 치잖으면 못살이라 매운 술을 마셔 돌아가는 그림자 발자최 소리
숨막힐 마음 속에 어데 강물이 흐르느뇨 달은 강을 따르고 나는 차디찬 강맘에 드리노라
수만호 빛이래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우에 이끼만 푸르러라.
(문장, 1941년 4월)
3) 이상적인 나라를 꿈꾸다
청포도
청포도靑葡萄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문장, 1938년 8월호)
황혼黃昏
내 골방의 커-텐을 걷고 정선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드리노니 바다의 흰 갈메기들 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보련다 그리고 네 품안에 안긴 모든 것에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다오
저 십이성좌十二星座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ㅅ소리 저문 삼림속 그윽한 수녀들에게도 시멘트 장판 우 그 많은 수인囚人들에게도 의지가지 없는 그들의 심장은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탄 행상대에게나 아프리카 녹음 속 활 쏘는 토인들에게라도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 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의 반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다오
내 오월의 골ㅅ방이 아득도 하니 황혼아 내일도 또 저 푸른 커-텐을 걷게 하겠지 암암暗暗히 사라지긴 시내ㅅ물 소리 같아서 한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나 보다
(신조선, 1935년 12월)
이육사평전(김희곤 저)
육사가 윤세주에게 한 말
육사는 김원봉이 부르주아계급을 바탕으로 삼은 중국국민당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중국의 부르주아계급과 야합”하고 있다면서 사상이 애매하여 비계급적이다“라고 비판하였다. 1933년 군사간부학교를 졸업할 때 공연한 육사가 쓴 희곡 <지하실>에서
경성의 모 공장 지하실의 어두운 방에서 노동자 일동이 일을 하고 있는데 라디오 방송으로 ‘모월모일 우리 조선혁명이 성공하다’라는 보도가 있고, 계속하여 지금 용산의 모 공장을 점령하였다든가, 지금 평양의 모 공장을 점령하였다든가, 지금 부산의 모 공장을 점령하였다든가 하는 방송을 해 오고, 마침내 공산제도가 실현되어 토지는 국유로 되어서 농민들에게 공평하게 분배되고, 식당 일터 주거 등이 노동자 등에게 각각 지정되어 완전한 노동자 농민이 지배하는 사회가 실현되었으므로 농민 노동자는 크게 기뻐하며 ‘조선혁명만세’를 고창하고 폐막하였다.
육사가 김원봉에게 국내 잠입을 해야 하는 이유 설명
나는 도회지 생활이 길어서 도회지인의 심리를 잘 이해하고 있으므로 도회지에 머물러 공작을 할 생각이다. 곧 도회지의 노동자들을 파고 들어서 공산주의를 선전하여 노동자들을 의식적으로 지도 교양하고, 학교에서 배운 중한 합작의 혁명공작을 실천에 옮겨 목적을 관철한다.
4) 댓가 없이 헌신하자
교목喬木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지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내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져 참아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인문평론, 1940년 7월)
무희의 봄을 찾아서( 박외선양 방문기)
박외선의 대답 중에서
다만 소박한 조선의 고전무용에 현대적인 감각을 담아서 신흥무용을 완성한다는 것은 조선의 문화적 정신과 전통에서 자라난 사람들이니 만큼
무용이라고 레알리즘을 전연 부정할 리야 있나요? 그렇다곤 해도 로멘티시즘도 영영 부정하긴 싫어요.
(창공, 1937년 4월호, 창간호)
1934년 문단에 대한 희망(-앙케이트에 답함)
외국의 문학유산의 검토도 유산이 없는 우리 문단에 필요한 일이겠지만 과거의 우리나라의 문학에도 유산은 적지 아니합니다. 좀 찾아 보십시오. -거저 없다고만 개탄하지 말고.
(형상,1934년 2월, 전문)
▲민족시인 이육사 순국 80주년 추모문학제 행사 후 단체사진 ©문해청 기자
▲1980대~1990년대 민족민중문화예술운동이 활성화 될 때 청년•학생•노동자•학생 운동에 투신하여 민족민중문화예술운동 일환으로 투신하여 힘찬 통기타가수로 민중가를 부르며 자주민주통일진보운동에 기여한 민중가수 이종일 가수가 노래하고 있다. ©문해청 기자
▲이육사 선생을 추모하는 「맨발의 춤사위」를 공연하는 박정희 의원(대구 북구의회 전 의원, 고려대 무용학박사)의 춤사위 공연하는 모습이다. ©문해청 기자
▲「광야」 「절정」 시낭송하는 오말임 의원(대구 동구의회 전 의원,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재단 대구경북지역위원회 공동대표) ©문해청 기자
▲이육사 시 「편복」 낭송하는 이유선 시인(시행위예술가. 대구시낭송협회 회장) ©문해청 기자
▲이육사 순국 80주년 추모문학제를 열며 「시로보는 육사, 삶의 자세」 연구발제를 발표하는 대구이육사기념사업회 상임대표 정대호 시인(문학박사, 도서출판「사람의 문학」 대표) 의 모습이다 ©문해청 기자
본사알림 <이 기사를 보내 준 문해정 기자는 1월 17일 갑작스럽게 별세하였습니다. 노동자 시인으로 대구에서 활동하던 중 운명하신 문해청 기자의 명복을 빕니다.> 1월 19일 프레스아리랑 직원 일동 <저작권자 ⓒ 프레스아리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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