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투쟁의 첫걸음
리봉수
일제와 지주들의 착취와 천대에 못이겨 정든 고향을 떠나 여기저기 살길을 찾아다니던 우리 일가가 동북 훈춘현 동포대 남소성자에 도착한것은 1929년이였다.
그곳에는 훈춘현에서도 소문난 악질지주 한희삼이란 놈이 있었다. 그는 땅을 300경이나 소유하였고 소 열다섯마리, 말 두필을 가지고있었으며 첩을 10여명이나 데리고사는 놈이였다.
맨주먹으로 고향을 떠난 나는 그놈의 땅을 부치며 소작살이를 하게 되였다. 당시 동만일대에서는 조선인혁명가들의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여 일본제국주의와 지주, 군벌들의 죄상을 폭로하는 선전삐라들이 각곳에 나붙었다. 이 삐라들을 보고 조직을 찾아볼 욕망이 일어난 나는 그 당시 한희삼의 소작인들속에서 사업하던 동무들과 자주 접촉하며 혁명적영향을 받게 되였다. 그들은 주로 반제동맹원들이였다.
1930년 11월(음력)어느날 저녁 리경수(나의 8촌형)와 함께 최희백동무의 집에 갔었는데 그곳에는 반제동맹 현위원이 와있었다. 한 동무는 집앞에서 망을 보고있었다. 회의에서는 나를 반제동맹에 가입시킬데 대한 문제를 취급하였다. 그들은 나에게 앞으로 동맹의 비밀을 엄수하며 열성적으로 사업해야 한다는것을 강조했다.
투쟁의 첫걸음
내가 반제동맹에 가입한후 약 3~4개월이 지난 어느날이였다. 리경수동무는 낯선 남녀 두사람을 데리고 우리 집에 와서 《이 두분을 뒤고방에 머물게 하고 잘 보호해야 한다.》고 부탁하였다. 나는 그 부탁을 쾌히 승낙하였다.
당시 공산당원들은 극비밀리에 활동하였으며 조직군중들도 자기 조직에서 누가 당원인가 하는것을 다는 몰랐던것이다.
후에 알고보니 한 동무는 공산당훈춘현위원회 서기로 있는 오빈동무였고 녀동무는 당부위인 김일권동무였는데 그들은 부부간이였었다. 그들은 우리 집이 독립가옥이였으므로 은신하기 좋은 까닭에 온것이였다.
나는 그들을 뒤고방에 정성껏 모셨다.
그날 저녁에 오빈동무는 나를 부르더니 《동무, 우리의 비밀을 잘 보장할수 있겠소?》하고 말하는것이였다. 나는 비밀을 잘 보장할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우리 집은 울타리가 없었다. 아무리 독립가옥이라 하여도 사람들이 찾아오는 일이 자주 있으므로 혹시 그들이 변소에라도 드나들 때 사람들이 볼수도 있는것이다.
그런데 우리 집에는 울타리를 만들 재료가 없었고 수수짚이라도 살수 있는 돈도 없는 형편이였다. 나는 그날저녁 여러가지로 대책을 연구하여보았다. 지주 한희삼에게 가서 해결해보려고도 생각했으나 욕심많은 지주놈이 잘 들어줄리 없었다.
그 이튿날아침 나는 어디가서 짚이나 구해볼가하여 집을 나서려고 했다. 그때 오빈동무는 《동무, 어디가오?》하고 물었다.
《집에 울타리가 없어 걱정되기때문에 어디 가서 짚이나 구해볼가 해서요.》하고 나는 대답하였다.
그는 나의 딱한 사정을 알아차리고 돈 10원을 내여주면서 《이것으로 울타리감을 사는데 보태시오.》하였다. 나는 별다른 도리도 없고하여 그 돈을 받았다. 장마당에 가서 울타리감 세바리를 사고 말장도 몇개 사왔다. 이렇게하여 휑하던 집뜨락은 가리여졌다.
그후 오빈동무는 매일저녁 나에게 약 두시간씩 정치사상교양을 주었다. 그리고 소책자들도 가져다주었다.
그는 쏘련에서의 사회주의혁명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세계무산계급의 혁명이 반드시 승리하며 조선인민들도 일제의 식민지기반에서 반드시 해방될수 있다는것을 해설하여주면서 그를 위하여 어떻게 싸워야 한다는것을 말하며 혁명조직의 공작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얼마 지나서 우리 집에는 또 낯모를 동무 세사람이 왔다. 그들은 등사판, 등사용지, 종이묶음을 가지고왔다. 이 사람들은 물북(훈춘강 북쪽지역) 황구를 중심으로 사업하다가 물남에 자리잡기 위하여 우리 집에 온것이였다.
그들은 나에게 등사기, 등사용지, 종이묶음을 맡기면서 그것을 은밀히 보관하여달라고 당부하고는 돌아갔다. 그들은 현당위원회 비서처에서 공작하고있는 동무들이였다. 나는 그 물건들을 소구유밑에 감춰두었다.
다음날밤에 오빈동무는 나에게 《동무가 받은 종이묶음안에는 삐라가 들어있소. 그것은 각구(당구)에 보낼것이요, 그리고 우리는 문건도 여기서 찍어서 발송해야 하겠소, 이제부터 동무네 집에서 삐라문건들을 인쇄하여 각구에 보내는 사업을 하게 된단말이요, 동무는 이런 공작을 할만 하오?》하고 묻는것이였다.
나는 선뜻 《해보지요.》하고 대답하였으나 우선 등사기와 많은 삐라들과 문건들을 어떻게 건사할것인가가 제일 큰 근심이였다. 방에다 두는것은 물론 위험한 일이며 그렇다고하여 땅속에다 묻는다 치더라도 누가 보면 《난데없이 땅밑을 왜 뚜지는가.》고 의심을 살수도 있는것이다.
나는 온밤 궁리하다가 우물을 파고 그것을 리용할 계획을 하였다. 우리 집에는 우물이 없어서 멀리 가서 물을 길어오는 형편이였다. 그러나 이곳 땅은 산이 뻗어내린곳이여서 어지간히 파서는 물이 날것 같지 않았다. 물이 날 때까지 깊이 판다면 우물이 무너질 념려가 많았다. 그것을 방지하자면 돌을 쌓아야 했다. 그 많은 돌을 어떻게 가져와야 할것인가, 이것도 큰일이였다.
나는 지주 한희삼을 리용하여볼가 하고 생각하였다. 그놈은 돈은 있으나 일자무식으로 땅고집이 있는놈이였다. 그러나 우리집 근처에 많은 땅을 가지고있는 그놈은 자기의 소작인들을 이곳에 옮겼으면 하는 의사도 가지고있었다. 그런데 물이 멀어서 누구도 이곳으로 오려고 하지 않았던것이다. 그놈의 집은 우리 집이 있는데서 약 5리 떨어진곳인데 나는 그 지주놈을 찾아갔다.
《령감님 내가 풍수를 뵈우니 우리 집앞에서 물이 날수 있다고 합디다.…》고 하니 그는 《그건 참 좋은 일이네. 그러면 어디 자네가 한번 파보겠나?》하면서 귀가 솔깃해하였다.
《그런데 령감님! 깊이 파들어가야 물이 있답니다.…》
《그러면 힘이 많이 들겠는데.》
《힘이 드는것이 문젠가요. 그보다 판 우물이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돌이 들텐데 그게 문제란말이지요.》
소작인을 종부리듯 하는 지주놈은 《여보게 그런 돌쯤이야 문제가 있나. 작인들을 시켜 그 동쪽산에서 얼마든지 가져올수 있지 않는가. 자네 꼭 파보게.》하면서 오히려 나를 부추기는것이였다.
나는 소작인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없지 않았으나 여하튼 목적을 달성할수 있게 된것이 기뻤다.
그날 점심때부터 집안식구를 총동원하여 우물을 파기 시작하였다. 진흙땅이여서 흙덩이를 한쪼각씩 깎아내다싶이 하면서 두길이나 파들어갔으나 물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물곬이 전혀 없는곳을 판것이나 아닌가? 진흙땅속에서 어떻게 물이 나올수 있겠는가? 동리사람들이 이곳에 집을 짓지 않은것이 리유없는 일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우물은 파야 한다. 이것은 나의 중요한 혁명임무가 아닌가, 파야 한다. 물이 나올 때까지 더 깊이 파보자! 땅속에는 물이 있는 법이다.》하고 나는 자기를 고무하였다. 나는 밤낮을 이어가면서 우물을 팠다.
흙은 용드레로 파올렸다.
좁은 땅굴속은 숨이 막히고 운신하기도 힘들었다.
이렇게 근 20여일이나 파들어가니 드디여 물이 터져나왔다. 나는 너무 기뻐서 그속에서 《물이다!》하고 소리쳤다.
이제는 지주놈이 작인들을 시켜서 실어온 돌로 우물벽을 쌓아올려야 하였다. 우물의 깊이는 다섯길이 잘되였는데 그것을 쌓는것도 큰일이였다. 나는 지면에서 약 1m가량 들어가서 우물안에 딴 구멍을 파고 오지독을 가로 묻었다. 이것이 나의 목적이였다. 이것을 위해 다섯길이나 되는 우물을 판것이다.
그리하여 그 오지독속에 등사기와 각종 인쇄물을 비밀리에 보관하였다. 나는 자기도 혁명을 위하여 일하였다는 그 사실이 얼마나 기쁘고 영예스러운지 몰랐다.
그후 오빈동무는 삐라와 문건들을 작성하고 나는 그것을 인쇄하여 각구에 발송하도록 준비하여놓았다. 밤이 되면 황구, 성구, 금구, 연구, 판구 등 각 조직구에서 통신원들이 우리 집에 와서는 통신도 가져가고 삐라도 가져갔다.
통신은 엷은 반지에다 글을 쓴것인데 잘 접으면 손가락짬에라도 감출수 있었다.
이런 통신을 전달하는 일에는 주로 녀성들, 아동들, 때로는 로인들까지 동원되였다. 녀성들은 함지박에 떡이나 국수를 담은 그릇속에 통신을 넣기도 하고 단지속에 넣어가지고도 다니였으며 머리카락밑에 넣기도 하였다.
아동들은 메뚜기치기를 하다가 한 아이가 메뚜기채를 쥐고달아나면 다른 아이가 그것을 빼앗으려고 따라가는척 하든가 또는 겨울이면 팽이를 돌리다가 쥐고달아나면서 통신련락을 하였다. 로인들은 지팽이속에 넣어가지고 다녔다. 그때는 지팽이를 짚고다니는것이 류행되여 그것을 통신련락에도 리용하였다.
이렇게하여 나는 통신의 비밀을 보장하였는바 이것은 투쟁의 첫걸음이였다.
당의 위임에 충실하여야 한다
오빈동무는 나에게 공산당원이란 어떤 사람이여야 한다는것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는 나에게 당원은 혁명을 위하여 끝까지 싸우며 당의 위임에 충실하며 필요할 때에는 생명까지도 서슴없이 바칠수 있는 준비가 되여있어야 하며 항상 경각성을 높이며 만약 공작하다가 적들에게 체포되여도 비밀을 고수하여야 한다는것을 말하여주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한마디도 빠질세라 귀를 기울이고 들었다.
그는 나를 매일저녁 교양주는 한편 가두삐라공작을 할 과업도 주었다.
하루는 나에게 삐라한장을 주면서 이것을 주먹속에 감출수 있게 접되 어디라도 붙이기만 하면 곧 펴질수 있게 하라는 과제를 주었다.
나는 쉽사리 그 방법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아 종일토록 이리접고 저리접고하여 겨우 그 방법을 알아냈다.
그러자 오빈동무는 나에게 《래일 이 삐라를 장거리에 나가 잘 보이는곳에 붙여놓고 오시오.》라고 하였다.
당시는 일제가 동북을 강점한 1931년 9.18사변직후였다.
나는 삐라를 받아쥐고는 또 궁리해보았다. 일제군경놈들이 주린 개처럼 눈에 쌍심지를 켜가면서 《불온분자》를 찾아다니는 장거리복판에 삐라를 붙인다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내가 소달구지에 나무를 싣고 훈춘시가지에 들어간것은 그날저녁때였다.
시내에 들어가니 여러사람들이 나무를 팔라고 하였다. 나는 《이 나무는 이미 팔렸소.》하고 매번 거절을 하고는 우차를 몰고 려인숙을 찾아갔다. 그날밤을 그곳에서 쉬기로 하였다.
려인숙방에 누운 나는 삐라를 붙일 궁리를 하다나니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아침에 달구지를 몰고 장거리에 나가보기로 하였다.
장마당에는 한낮이 되면서부터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경찰놈들이 무시로 싸다녔다. 나는 삐라를 붙일 생각으로 가슴을 조였다. 그런데 마침 긴 칼을 찬 순사한놈이 사냥개처럼 어슬렁어슬렁 내앞을 지나갔다.
나는 달구지에 걸터앉아 그놈의 거동만 살피고있었다.
순간 나의 머리속에는 번뜩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삐라를 저놈의 잔등에 붙인다면 가장 잘 보일것이 아닌가?》
나는 네귀를 몇번이고 접고접어서 납죽하게 된 삐라의 뒤에 풀을 잔뜩 발라가지고 순사놈뒤를 슬그머니 따랐다.
순사놈은 장마당복판에 들어가더니 사람들이 빼곡이 모여 밀치고닥치고 하는 속으로 들어가는것이였다.
나는 그놈의 등뒤에 바싹 다가붙었다. 그자는 사람들속에서 무엇을 찾는지 두리번거리며 정신을 팔고있었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머리를 옆으로 돌려 사람들이 떠드는곳을 보는척하면서 손에 쥐고있던 삐라를 곁사람도 모르게 순사놈의 등에 붙이고는 슬쩍 사람들속으로 피해들어갔다.
다시 나는 달구지에 돌아와앉아서 그놈의 거동을 바라보았다. 순사놈의 등에서 삐라는 차차 쭉 펴지기 시작했다.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라고 굵직하게 먹으로 쓴 삐라의 내용이 나타났다. 순사놈은 그런줄도 모르고 거들먹거리며 장마당을 돌아다니였다.
사람들은 의아한 눈으로 그놈의 뒤잔등에 붙어있는 삐라를 바라보고는 구석구석에서 수군거리며 웃음을 참느라고 애썼다.
이리하여 순사놈은 온 장마당사람들이 웃음거리로 되였다.
내가 소에 달구지를 메우고 장마당을 떠나려고하는데 순사놈은 사람들이 자기를 보며 웃는 눈치를 보고 그제서야 자기의 잔등에 삐라가 붙어있는것을 알게 되였다. 당황망조한 그놈은 눈을 부라리고 고함을 치며 돌아갔다.
큰일이 났다고 경찰놈들이 모여들었고 성문도 닫겼다. 오고가는 사람들을 샅샅이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놈들은 《범인》을 발견할수 없었다.
놈들은 날이 저물어서야 성문을 열었다. 나는 통쾌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오빈동무는 나를 보고 벙글벙글 웃으며 《동무는 참 용감하오.》하고 치하하는것이였다.
후에 알고보니 그는 집에 앉아서 벌써 내가 돌아오기전에 장마당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통보를 듣고있었던것이다.
나는 그후에도 삐라공작을 계속하였다.
일본령사관 담벽에도 붙였고 령사관마당에 돌멩이를 싼 삐라를 수많이 뿌려넣기도 하였다.
* *
이렇게 하여 나는 조직에서 주는 임무를 매번 기어코 수행하였다. 어느날 오빈동무는 《동무를 당에 받아들이기로 했소.》하면서 자기가 직접 나의 입당보증을 서주었다. 나는 당지부회의에서 입당결정을 받게 되였다. 그날은 1931년 11월 23일이였다.
나는 그때 난생 처음으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자기자신이 당원이 되였다는것이 꿈같은 일이였었다. 그때 나의 정치적의식은 미약하였으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령도하시는 조선혁명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것을 서슴없이 바칠수 있는 각오만은 튼튼히 간직하고있었다.
8. 장백현사람들
김정필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친솔하신 조선인혁명군 주력부대가 장백지방에 진출한것은 1936년 8월말경이였다.
장백지방에 진출한 인민혁명군부대들은 백두산기슭에 근거지를 설정하고 광활한 지역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고있었다.
인민혁명군의 장백지방진출에 앞서 김일성동지께서는 우선 인민혁명군내의 정치간부들을 장백일대의 군중들속에 깊이 침투시켜 당조직을 내오는 한편 광범한 력량을 결속시키기 위하여 조국광복회망을 확장하였다. 그리하여 장백일대의 대중들의 정치적지반은 일층 강화되였다.
이와 같이 하면서 김일성동지께서는 인민혁명군주력부대를 이끄시고 국경지대에서 일련의 큰 작전들을 수행하심으로써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하였으며 항일투쟁에로 인민대중의 정치적열의를 불러일으키였다.
1936년 9월초 장백현 대덕수 및 소덕수전투를 서막으로 하여 장백현 반절구전투, 20도구전투, 2도강전투들과 그해 적들의 《동기대토벌》공세를 격파하기 위한 곰의골, 홍두산, 도천리, 리명수전투들은 바로 그 대표적인 전투들이였다.
장백지방에로의 인민혁명군의 진출과 국경지대 여러 전투들에서의 승리는 지방인민들을 반일투쟁에로 더욱 강력히 고무추동하였으며 그후 인민혁명군에 대한 그들의 원호사업은 일층 강화되였다.
1937년봄 김일성동지의 친솔하에 무송현 동강지대에 들어가 겨울을 난 주력부대가 아직 장백현지방에 나오지 않았을 때였다.
15명의 유격대원으로 구성된 소부대는 장백현 지양개치기에 밀영을 짓고 지방에 나가 정치공작도 하고 경제모연공작도 하였다.
나는 이때 군수관의 직무에 있으면서 주로 경제모연공작을 담당하였다.
이때에 적들은 지난 《동기대토벌》에 수만명의 병력을 집중시켜 발광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인민혁명군주력부대들의 행적을 몰라 안달아 발광하면서 인민들에게 갖은 행패를 다하였다.
그러나 인민들은 굴함없이 자기의 모든 힘을 다하여 인민혁명군과 함께 싸웠다.
당시 조국광복회조직망은 기묘하게 조직되였었다. 적지 않은 동네의 조국광복회 지회조직들은 적들의 통치기구를 리용하였다. 그리하여 조국광복회 지회회장이 부락촌장을 겸하고있는곳이 많았다. 조국광복회 회원인 촌장들은 적들의 통치기구의 촌장이란 합법적인 직무를 리용하면서 인민들에게 정치적영향을 주는 한편 인민혁명군에 물심량면의 원호사업을 조직하였다.
얼핏 보기에는 부락주민들이 적들이 임명한 촌장을 중심으로 결속된것 같았다. 그러나 사실은 혁명조직의 주위에 뭉친것이였다.
그리하여 장백일대의 주민들은 거의 매일과 같이 쌀, 피복, 신발 등의 짐을 지고 인민혁명군부대를 찾아갔다.
이러한 형편에서 군중들의 혁명열의를 조직적으로 발동시키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였다. 나는 이를 위한 사업의 한 방법으로 적의 통치기구를 리용할것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밀영에서 련대정치위원의 지도하에 각 촌장들에게 보내는 정식공문을 작성하였다.
공문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였다.
강도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조선의 독립과 인민의 해방을 위한 성스러운 싸움에 궐기한 조선인민혁명군의 승리를 위하여 어느날까지 어느 지점에 얼마만한 량의 물자를 반드시 가져오라고 쓰고 공문의 끝에 조선인민혁명군 군수관 김용수라고 새긴 도장을 찍었다. 공문을 작성한것은 적들에게 부락 촌장들이 혁명군의 원호사업을 조직하고도 피할수 있는 구실을 주며 인민들의 원호사업을 조직적으로 발동시키자는데 있었다.
나는 그때에 작성한 공문을 장백현관하 2도강, 지향개, 대덕수, 소덕수, 천상수리, 도천리, 13도구, 14도구, 우럭골, 반절구, 요방자 등 20여개의 부락에 하달하였다.
공문을 받은 조국광복회 회원인 촌장들은 표면에서는 생명의 위험에 못이기는척하면서 비밀리에 조국광복회조직들을 통하여 인민들에게 정치사업을 진행하였다.
항일유격대의 혁명적영향을 받은 인민들은 모든 힘을 다하여 자기의 혈육과 같이 사랑하는 우리 혁명군에 정성어린 원호물자를 조직적으로 보내주군 하였다.
1937년봄 1~2개월동안 장백현내 20여개의 툰에서 들어온 원호물자만 하여도 쌀 10여섬과 광목 100여필, 지하족 200여컬레, 초신 300여컬레에 달하였다.
나는 수많은 장백현사람들중에서도 항일유격대대렬에 참가한 300여명의 애국적청년들과 이해봄에 인민혁명군의 원호물자를 지고온 요방자부락 로인들을 잊을수 없다.
이해 4월 어느날, 나는 요방자부락에서 원호물자가 들어올 날자가 되여 약속된 지점인 큰골(14도구)치기에 이르렀다.
나는 산등성이에 올라 사방을 살피고있었다. 한참만에 멀리 아래 물홈타기로부터 올라오는 짐군들이 보였다. 틀림없는 요방자부락사람들이였다.
나는 그들을 반겨맞아 물홈으로 내려갔다.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하고 나는 인사하였다. 짐군은 모두 5명이였다. 키 큰 중년, 장년도 있으며 로인도 있었고 젊은 청년도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고 옛친구를 만난듯이 동무 혹은 자네 하면서 얼마나 고생을 하는가고 인사하였다.
나는 먼저 제일 나이많은 로인의 짐부터 내려놓았다. 먼저 짐을 내려놓은분들은 다른 사람의 짐을 내려주었다. 짐을 내리며 그들은 사방을 유심히 살펴보고있었다.
나는 짐들을 은페지에 운반하였다. 해는 벌써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모두 각기 휴식하기 좋은 자리들을 잡아앉았다.
나는 모두들 휴식도 하고 식사도 하라고하였다. 그리고 부락사람들을 인솔하여온 로인을 딴곳으로 데리고가서 부락지형이며 지고온 짐의 물품내용들을 물었다.
그는 품속깊이에서 글쪽지를 내놓으면서 촌장이 보내더라고 하였다.
내용을 읽어보니 물품은 부락인민들이 한푼두푼 모은 돈으로 산것도 있었으며 돈을 못내는 부락인민들이 직접 낸것도 있었다.
6필의 광목과 40컬레의 지하족, 수십컬레의 각반 등 지성어린 수많은 물품들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편지에는 물품을 운반하여온 인민들에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져있었다. 그들은 서로 피차의 래력을 자세히 모르나 3명은 조국광복회 회원이라는것이였다. 끝으로 우리들의 전투승리를 축원하는 말과 인수하였다는 수표를 하여보내라는것이 적히여있었다.
그 로인은 나에게 이번에 장군님을 뵈옵게 하여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장군님은 이곳에 계시지 않는다는것을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그 로인을 데리고 휴식하는 장소로 나왔다. 모두 식사를 시작하였다. 부락민들은 자기들이 가지고온 주먹밥을 내몫까지 따로 내놓았다.
나는 사양하다못해 감사를 드리고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였다.
나는 부락민들에게 간악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파쑈통치를 폭로하면서 우리 혁명군의 전과들을 소개하였다. 계속하여 조국광복회 강령내용을 해설하면서 김일성동지의 탁월한 령도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들은 김일성동지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듣는바가 아니였으나 그 이야기를 듣는데 열중하고있었다. 내가 이야기를 끝마쳤을 때였다.
그들중 키가 작고 불그스름한 구레수염을 가진 중년남자는 내가 이야기할 때부터 몹시 흥분하여 듣더니 내말이 끝나자마자 불쑥 말을 꺼냈다. 《여보 군대어른, 내 꼭 말할게 있소다. 나는 지금 집에 몸푼 처를 두고 이 사람들이 산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듣고 촌장하고 싸우다싶이하여 이곳까지 왔소다.…》 다른 사람들은 무슨 실언이라도 나올가봐 그러는지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있었다.
그는 말을 계속하였다. 《전해에도 짐을 지고 장군님부대를 따라갔으나 밤중에 우리를 돌려보내는 바람에 장군님을 뵈옵지 못했소다. 다른 소원이 없소다. 이번에 장군님을 꼭 만나게 해주오다.》
그제야 다른 사람들도 《옳소다. 우리모두 꼭 만나게 해주시오다.》고 하였다. 내가 무어라 말하기전에 내곁에 앉아있던 더덕더덕 기운 토스레 겉저고리를 입은 로인이 말을 꺼냈다. 《나는 장군님을 만나 이놈의 세상이 언제 뒤집히는지 알고싶소다. 우리 장군님이야 다 알게 아니외까.…》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두주먹을 불끈 쥐고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 말에도 동감인듯 하였다. 나는 김장군님이 이곳에 계시지 않는다고 딱한 사정이야기를 하였다. 그들의 얼굴엔 퍽 서운해하는 기색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소원을 풀어줄수는 없었다. 잠간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제일 늙은 로인이 《여보 젊은 군대어른, 내 한마디 물어볼 말이 있소다.》이렇게 말하는 그는 곁눈질을 하면서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우리 장군님께서 축지법을 쓰신다는데 정말이외까?》나는 빙긋이 웃었다.
부락사람들을 책임지고온분도 웃었다. 그런데 곰방대를 빨고있던 한 로인은 대통을 돌에 툭툭 털면서 《이 사람아, 축지법을 쓰다마다 그러길래 전해에도 우리 군대들이 왜놈들을 눈코뜨지 못하게 안시공, 2도강, 우적골을 치지 않았나. 장군님은 산을 다녀도 주름을 타서다닌다네. 여보 내말이 옳지요?》하면서 나를 보았다. 그는 마치 말다툼에서라도 이긴듯이 신이나 하였다. 그런데 곰방대를 든 그 로인이 큰 보물이라도 내놓듯이 말을 계속하였다. 《이보오다. 아, 우리 장군님에 대한 이야기야 더 할게 있습네까. 하늘이 낸 장수인데 글쎄 이 장백에 장군님이 나오시더니 밤삼경이면 은하수짬에 없던 새별이 더 반짝거리지 않소. 모두들 보지 못했소. 나는 전번에도 그 별을 보고 박령감하고 이야기했소다만 이제 큰 변이 날거우다. 왜놈들이 쥐락펴락하는 세상도 얼마 못갈게우다.》자신만만한 그의 말에 모두들 《그럼, 그럼》하면서 찬동할뿐이였다.
나는 구태여 그들의 이야기를 깨우쳐 설명하고싶지 않았다.
위대한 수령님을 믿고 그이께서 령도하시는 우리 인민혁명군에게 모든것을 의탁하고있는 그들에게 조국의 독립과 인민의 해방을 위한 투쟁의 선두에 선 김일성동지의 탁월한 령도와 우리 인민혁명군의 성스러운 사명에 대하여 강조하였을 따름이였다.
장백현사람들 ㅡ 우리 유격대는 이러한 인민들의 군중적지반을 가졌음으로 하여 15성상의 간고한 투쟁에서 빛나는 승리를 달성할수 있었다. <저작권자 ⓒ 프레스아리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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