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생일을 맞이하는 비전향장기수 한장호 선생의 일생
나는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조선을 방문하게되면 장기수선생님들이 사는 아파트를 꼭 방문하여 그들을 만나 인사도 하고 그들의 아름다운 공연을 보며 감동을 받아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 한장호 선생도 그 중의 한분이었다. 그는 38년간 이남에서 감옥생활을 하였다.
최장기수 김선명 선생은 43년을 감옥에서 살았고 세상에 널리 알려진 종군기자 리인모 선생은 34년간 옥살이를 했다. 이남정권은 이들 사상범들을 0. 75평 정도되는 먹방에 홀로 가두어 두곤 하였으며 때로는 심한 벌로 이들을 2㎡밖에 안 되는 개별감방에 무려 10~13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몇 달 동안 몰아넣기도 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짐승만도 못한 비인간적인 처사였다. 13명이 앙상한 몸을 하고 2㎡밖에 안 되는 방에 서있으면 가슴이 조여들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고 한다. 아마 보통 사람들 같으면 며칠 못살고 죽었을 것이다. 이들은 참으로 위대한 신념과 의지의 강자들이었다. 이들 장기수들의 전기나 신문기사들을 읽을 때마다 나는 <참된 인간>이란 어떤 인물들이며 <값 높은 삶>이란 어떤 것인지 깊이 사색하곤 했다. 도대체 무엇이 저들 장기수들을 20년, 30년, 아니 40년간 겨우 0.75평의 먹방에서 생존하게 했을까. 나는 묻고 또 물어보았다. <약속>이었다.
그들이 남으로 내려오면서 수령과 맺은 약속때문이었다. 수령과 맺은 조국통일 과업을 앞당겨 오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수령이 누구인가? 자기 자신이 원하는 요구와 이익을 실현시켜주는 분이 바로 수령이다. 내가 원하는 자주적인 나라, 내가 바라는 통일된 나라, 내가 바라는 평등한 세상을 이루어주는 수령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장기수들은 죽음을 초월한 극복자(overman)의 삶을 살았다.
그렇다. 김선명과 리인모, 한장호의 수령,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생명의 중심인 수령과 한 약속은 바로 우리 민중, 우리 민족이 원하는 자주적이고 평등한 통일된 조국을 하루라도 빨리 실현하자는 것이었다. 수령과의 약속은 바로 한 인간으로서 자기와의 약속이었다. 이 위대한 약속이 장기수들을 극복자들로 만들었다. 한장호 선생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께서 나를 아니 우리 비전향장기수 모두를 항상 잊지 않으시고 계신다. 내 떳떳이 싸워 동지들의 믿음, 수령님과 장군님의 크나큰 신임에 보답하자. 그 길에서 평생 감옥에 갇혀있어도 좋다. 여기에서 생을 마쳐도 조국은 이 아들을 자랑스럽게 기억할 것이다.”
다음으로, 이들 장기수들은 자신들이 해방 후 경험한 북과 남의 사회적 현상이 너무나 차이가 있는데 놀랐을 것이다. 북에서는 항일혁명을 주도한 애국세력들이 정권을 잡고 토지개혁 등 인민적 시책을 펼치면서 어떻게 해서라도 분단을 막으려고 <남북연석회의>를 열어 김구, 김규식, 등 이남의 민족지도자들과 통일을 논의하고 통일정부를 지향했는데 이남에서는 통일을 지향하는 김구, 여윤형선생 등을 암살하고 이승만을 앞세워 단독선거를 실시하고 4.3사건과 같은 사건들을 무수히 조작하여 이남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지향하는 무수한 애국자들을 처형하였다.
이들 장기수들이 이남으로 내려와 살아본 삶은 참으로 사기와 협잡이 난무하고 빈부의 격차가 심한 사람살 곳이 못된다고 느꼈을 것이다. 이북의 최고지도자와 조선로동당이 조국통일과 자주적인 사회주의 나라를 지향하는 세상에서 잠시라도 살아본 이들 장기수들은 이남의 반민족, 반통일세력들이 판치는 반통일적인 불평등한 사회현상을 보면서 자신들이 신념으로 간직한 참된 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배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통일지향적인 자주적인 참된 복지사회인 조국을 배신하는 것은 바로 자신을 배신하는 것으로 그들은 느꼈을 것이다.
장기수들은 이남으로 오기 전에 인간은 생물유기체로서의 <육체적 생명>과 함께 사회적 존재로서의 <사회정치적 생명>을 지니고 있다고 배웠다. 인간을 하나의 생물유기체로 볼 때 인간의 생명은 곧 육체적 생명을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육체적 생명>과 함께 <사회정치적 생명>을 가지고 사는 존재이이다. 육체적 생명이 생물유기체로서의 사람의 생명이라면 사회정치적 생명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사람의 생명이다. 사회정치적 생명은 사회적 존재인 사람에게 고유한 생명이다.
물론, 인간에게 있어서 육체적 생명이 귀중하다. 인간은 육체적 생명이 있어야 사회정치적 생명도 지닐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육체적 생명의 요구를 실현하는 물질생활은 사람의 일차적인 요구를 실현하는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육체적 생명은 물질적인 영양소를 섭취함으로써만 보존되는 개체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 장기수들도 보잘 것 없는 감방의 음식물을 잘 씹어 소화시키고 운동도 열심히 하였다.
한 장호 선생은 38년간 반주먹도 안되는 강보리밥에 맹물같은 멀건 국을 먹으며 살을 파고드는 추위, 찌는 듯한 무더위와 싸워야 하고 매일같이 가해지는 전향강요와 악착한 고문 속에서 몸을 지탱해나간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았지만 뼈밖에 남지 않은 몸이라도 보존하기 위해 한모금의 물로나마 피멍진 부위를 문지르고 몸단련을 부지런히 해나가는 것을 그는 감옥에서 어길수 없는 일과로, 철칙으로 안고 살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사회주의 조국에 안겨 현재 100살까지 건강하게 살고 있다.
한편, <사회정치적 생명>은 인간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사상을 정신적 양식으로 하는 사회적 집단의 생명이다. 육체적 생명이 부모의 품에서 태어나서 부모의 보호아래 성장하는 개체적 생명이라면 사회정치적 생명은 사회적 집단의 품에서 태어나 꽃을 피우는 집단적인 사회적 생명이다. 이처럼 육체적 생명의 실체는 생물학적 개체이지만 사회정치적 생명의 실체는 사회정치적 집단이다.
김정일위원장님은 다음과 같이 강조하셨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귀중한 생명이 사회정치적 생명인 것만큼 사람의 값 높은 삶은 사회정치적 생명을 지니고 그것을 빛내며 사는 것이다. 사람은 사회정치적 생명을 사회적 집단으로부터 받아 안는다. 사회적 집단은 사람의 사회정치적 생명의 모체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삶이 값있는지 없는지 하는 것은 사람이 사회적 집단과 어떻게 결합하는가 하는 데 달려 있다. 사람의 삶은 사회적 집단의 사랑과 믿음을 받으면 값있는 것으로 되고 사회적 집단의 버림을 받으면 값없는 것으로 된다. 사람은 개인의 이익보다 사회적 집단의 이익을 더 귀중히 여기고 사회적 집단을 위하여 충실히 복무할 때 사회적 집단의 사랑과 믿음을 받게 된다. 결국, 사람의 가장 값 높고 보람 있는 삶은 자기 운명을 사회적 집단의 운명과 결합시키고 사회적 집단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복무하면서 사회적 집단의 사랑과 믿음 속에서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생활을 누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사회정치적 생명을 빛내며 사는 길이며 사회적 존재로서 사람답게 사는 길이다.”
육체적 생명보다 사회정치적 생명을 더 귀중히 여기는 것은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본성적 요구”라고 김위원장님은 생각하셨다. 한장호 선생을 비롯한 장기수들도 역시 인간 본연의 참모습에 부합되는 생활, 인간다운 생활이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성에 맞는 생활, 즉 자주적인 생활이라고 믿었다. 사회정치적 생명의 요구를 떠나 육체적 생명의 요구만을 추구한다면 아무리 풍족한 물질생활을 누리면서 장수하여도 그것은 결코 고귀한 생애로 될 수 없다고 장기수들은 생각했다. 장기수들은 사회적 집단인 민족, 민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의 길에서 사는 삶, 즉 인간 본연의 존재가치를 빛내는 삶, 그리고 분단된 조국을 하루 빨리 통일시키는 일에 헌신하는 삶이 가장 값 높고 보람 있는 삶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기에 이들 장기수들은 어떤 시련도 극복할 수 있었다.
또한, 이들 장기수들은 동지들과 함께 투쟁했기에 모든 시련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었다. 한장호 선생은 감옥에서 동지들과 함께 집단적으로 투쟁한 이야기를 자주 언급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비록 감방 안에 혼자 있어도 커다란 감옥건물안엔 생사를 같이 하는 수많은 우리 동지들이 있다. 그러니 외롭지 않다.”
한장호 선생은 동지들의 사랑이 없었다면 그 어려운 감옥생활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고백하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동지를 위해 자기 모든 것을, 지어 목숨까지도 바칠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동지가 아니겠습니까. 진정 동지는 생사를 같이할 귀중한 전우였으며 형제이고 또 하나의 나자신이였습니다. 나는 그것을 38년간의 감옥생활에서 실지 온몸으로 체험하였습니다. 동지, 그 부름은 정녕 그 어떤 절해고도, 최악의 시련 속에서도 믿음과 사랑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는 사람들, 가장 진실한 량심과 의리로 수령께 다진 맹세를 끝까지 지켜 싸우는 사람들에 대한 값높은 칭호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참된 동지적 사랑과 단결이 고난도 시련도 용감히 뚫고 헤쳐나갈 수 있게 하는 무적의 힘의 원천이라는 것은 우리 혁명력사가 실증한 고귀한 진리입니다.”
뼈만 앙상한 장기수들의 참된 동지적 사랑과 단결이 그 모진 고문과 박해를 이겨낼 수 있었던 <무적의 힘>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지금도 <동지애의 노래>를 매일 부르고 있다.
“가는 길 험난하다 해도 시련의 고비 넘으리
불바람 휘몰아쳐 와도 생사를 같이 하리라
천금 주고 살수 없는 동지의 한없는 사랑
다진 맹세 변치 말자 한별을 우러러 보네”
“돌우에 피여나는 꽃은 그 정성 키운것이고
죽어도 잃지 않는 생은 그 사랑 주신거라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가야 할 혁명의 길에
다진 맹세 변치 말자 한별을 우러러 보네”
우리 민족, 민중의 자주성을 위한 투쟁과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 자기의 모든 지혜와 힘을 다 바치며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변함없이 우리 민족, 민중의 자주위업과 조국통일에 헌신하며 부끄럼 없이 일생을 바친 장기수들이야말로 우리 민족, 민중과 함께 영생한다고 생각한다.
아래는 5월 1일 북의 매체 「우리 민족끼리」 가 게재한 "100살장수자의 인생철학 비전향장기수 한장호"의 기사 내용이다. 전문을 원문 그대로 보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100살장수자의 인생철학
비전향장기수 한장호
류수와 같은 세월속에 어느덧 제나이 100살입니다.
세상을 살아온지 한세기가 된다고 생각하니 지나온 날과 달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걸어온 인생의 려정이 눈에 삼삼 어려옵니다.
일제의 식민지통치하에서 가정의 맏이로 태여나 짐승같은 노예살이를 하던 어린시절, 현해탄을 건너 모진 고생과 고통속에 흘러간 고학시절, 해방후 남조선에서 미군의 군화발밑에 짓밟히우며 2년가까이 학생들을 가르친 나날, 공화국의 품에 안겨 인생의 새 출발을 하며 3년간 교단에 섰던 환희롭고 벅찼던 나날들, 그리고 38년간에 이르는 남조선에서의 지옥같은 감옥생활, 공화국의 품에 다시 안겨 누려온 행복으로 가득찬 꿈같은 생활들…
류다른 인생길과 더불어 100년, 추억의 노를 쉬임없이 저어가는 나의 가슴속에 소중히 간직된 인생철학에 대하여 터놓으려고 붓을 들었습니다.
내 한생의 총화 《동지애의 노래》
사람들은 흔히 노래는 사람들의 생활과 가장 밀접히 련관되여있는 친근한 예술이라고 말합니다. 인간들이 사는 곳에는 응당 생활이 있고 생활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노래가 있기때문입니다.
누구나 그러하듯 나도 노래를 사랑합니다. 내가 23년전 위대한 장군님의 숭고한 의리에 떠받들려 공화국의 품에 다시 안긴후 가족들앞에서, 친지들앞에서 많이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한생이 집약되여있는 노래, 내 인생의 주제가인 《동지애의 노래》입니다.
가는 길 험난하다 해도 시련의 고비 넘으리
불바람 휘몰아쳐 와도 생사를 같이 하리라
천금 주고 살수 없는 동지의 한없는 사랑
다진 맹세 변치 말자 한별을 우러러 보네
…
내가 귀여운 젖먹이 손녀애를 품에 안고 계속 불러주던 노래도 《동지애의 노래》였습니다. 그 손녀는 지금도 자기는 나서 처음으로 귀에 익힌 노래가 할아버지가 들려주던 《동지애의 노래》였다고 자랑삼아 말하군 합니다. 집에 찾아오는 사람마다 이 말을 해주면 그들은 애기때부터 《동지애의 노래》를 자장가로 들으며 자란 아이는 세상에 없을것이라고 웃으며 말하군 합니다.
그만큼 나는 《동지애의 노래》를 사랑합니다.
주체89(2000)년 가을 제가 공화국의 품에 다시 안겨 제일 먼저 배운 노래가 바로 《동지애의 노래》였습니다. 사실 남쪽에 있을적에는 이 노래에 대해 몰랐습니다. 그런데 조국의 품에 안겨 이 노래를 접하고 가사와 곡을 음미해보니 참으로 제가 걸어온 한생의 려정, 신념을 지켜싸운 옥중투쟁의 나날들이 노래가사의 내용과 많이 얽혀있는듯 싶었습니다.
38년간의 대부분을 한평도 안되는 독감방에서 생활하면서 솔직히 고독감에 몸부림치고 지어 절망감에 사로잡혔던적도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때마다 자신을 다잡으며 이렇게 가다듬군 하였습니다.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비록 감방안에 혼자 있어도 커다란 감옥건물안엔 생사를 같이 하는 수많은 우리 동지들이 있다. 그러니 외롭지 않다. 보다 중요하게는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께서 나를 아니 우리 비전향장기수모두를 항상 잊지 않으시고 계신다. 내 떳떳이 싸워 동지들의 믿음, 수령님과 장군님의 크나큰 신임에 보답하자. 그길에서 평생 감옥에 갇혀있어도 좋다. 여기에서 생을 마쳐도 조국은 이 아들을 자랑스럽게 기억할것이다. …
이런 생각을 하면 외로움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온몸에 힘이 솟았습니다.
대체로 적들은 사상범들을 0. 75평이 되나마나한 먹방에 홀로 가두어넣군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성차지 않은지 우리에게 극심한 고통을 줄 목적으로 2㎡밖에 안되는 개별감방에 무려 10~13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몇달동안 몰아넣기도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극악한 반인권적이고 반인륜적인 만행이였습니다.
13명이 서있으면 가슴이 조여들고 숨쉬기가 헐치 않습니다. 대부분이 앙상한 몸들인것이 다행이였습니다. 앉으려면 서로가 다리를 얼기설기 엮어 괴롭게 앉아있어야 했고 누울 생각조차 못하였습니다. 앉아서 졸다 숨가빠 깨여나면 서로가 서로에게 깔리고 올라타있는 제모습들을 발견하군 하였습니다.
한번은 나와 다른 동지가 놈들에게 끌려가 혹심한 고문을 당하고 감방안에 질질 끌려 들어왔던적이 있었습니다. 놈들이 집단적으로 달려들어 매를 안기는데 분격하여 한놈의 사타구니를 발로 걷어차 나자빠지게 하였더니 놈들은 나를 다른 동지보다 더 악착스레 고문하였습니다.
동지들은 상처입은 우리의 처참한 모습을 보며 분격해하면서 한쪽으로는 그 좁은 감방에 우리를 눕혀 정성껏 간호해주었습니다. 낮에도 밤에도 11명의 동지들은 교대로 우리를 자기들의 다리와 몸우에 올려태우고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해주려고 애썼습니다. 그렇게 하면 몸이 빨리 추설수 있다고 롱질도 하면서 말입니다. 동지들은 뼈만 남은 앙상한 몸으로 우리의 몸이 찬바닥에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해 거의 열흘간이나 고생했습니다. 이런 일은 한두번이 아니였습니다.
어찌 그뿐이겠습니까.
다른 감방안에 서로 갈라져있어도 누가 생일이 되면 자기들에게 차례진 한덩이의 강보리밥도 서슴없이 건네주고 맹물로 끼니를 달게 굼때는 일도 있었습니다. 감옥의 동지들에게 넝마같은 옷마저 남겨두고 맨살바람의 몸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동지들은 또 그 얼마이겠습니까.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은 수십년간에 이르는 감옥생활 전기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동지를 위해 자기 모든것을, 지어 목숨까지도 바칠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동지가 아니겠습니까.
진정 동지는 생사를 같이할 귀중한 전우였으며 형제이고 또 하나의 나자신이였습니다. 나는 그것을 38년간의 감옥생활에서 실지 온몸으로 체험하였습니다.
동지, 그 부름은 정녕 그 어떤 절해고도, 최악의 시련속에서도 믿음과 사랑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는 사람들, 가장 진실한 량심과 의리로 수령께 다진 맹세를 끝까지 지켜 싸우는 사람들에 대한 값높은 칭호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참된 동지적사랑과 단결이 고난도 시련도 용감히 뚫고 헤쳐나갈수 있게 하는 무적의 힘의 원천이라는것은 우리 혁명력사가 실증한 고귀한 진리입니다.
비록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은 감옥에 있을 때 《동지애의 노래》를 알지 못하였지만 이 노래속에 담겨진 숭고한 사상과 진리대로 신념을 지켜싸웠다고 할수 있습니다. 천금주고 살수 없는 동지애의 힘으로 우리는 자신들의 혁명적신념을 더욱 공고히 해왔기에 승리자가 되여 조국의 품에 떳떳이 긍지높게 안길수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공화국의 품에 안긴후 《동지애의 노래》에 접하고 가슴이 벅차올라 제일 먼저 이 노래를 배웠던것입니다.
노래는 심장의 선률이라고 말하군 합니다. 한 인간이 즐겨부르는 노래를 들어보면 그의 감정과 열정을 알수 있고 사상정신적높이를 가늠할수 있습니다.
《동지애의 노래》, 이는 정녕 나의 신념과 의지가 구절구절에 뜨겁게 어려있는 내 심장의 목소리, 내 삶 100년을 관통하는 인생철학이 담겨진 심장의 노래입니다.
지금도 나는 사람들이 노래를 불러달라고 요청하면 선참으로 일어나 《동지애의 노래》를 숭엄하고 격조높이 부르군 합니다.
동지애의 력사속에 빛나는 삶
며칠전 기자들이 나를 찾아온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손녀와 함께 집뜨락의 꽃밭에 물을 주고있는 나를 알아본 기자들중 한사람이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이렇게 묻는것이였습니다.
《선생님은 100살인데도 불구하고 걸음걸이도 말하는것도 기억하는것도 젊은 사람들 못지 않습니다. 정말 부럽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정정하실수 있습니까.》
그 물음에 나는 건강비결은 다른데 있지 않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나의 건강을 되찾아주시고 경애하는 원수님께서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이 복락을 누리며 장수하도록 세심히 보살펴주시는 덕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해주었습니다.
사실 38년간 반주먹도 안되는 강보리밥에 맹물같은 멀건 국을 먹으며 살을 파고드는 추위, 찌는듯한 무더위와 싸워야 하고 매일같이 가해지는 전향강요와 악착한 고문속에서 몸을 지탱해나간다는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정신적신념을 잃지 않고 부단히 벼려나가는것, 이와 함께 뼈밖에 남지 않은 몸이라도 보존하기 위해 한모금의 물로나마 피멍진 부위를 문지르고 몸단련을 부지런히 해나가는것을 나는 감옥에서 어길수 없는 일과로, 철칙으로 안고살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얼마간의 생명연장으로 될수 있을지는 몰라도 장수의 비결로는 절대로 될수 없는것입니다.
주체89(2000)년 9월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이 조국의 품에 안길 때 적들은 우리가 몇년 지어 몇달도 살수 없을것이라고 비꼬았습니다. 며칠만에 죽을 사람까지 있다며 그 수자까지 내놓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통일애국의 신념을 버리지 않는다는 단 한가지 리유로 수십년세월 차디찬 감방, 피비린내 짙은 고문장에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모진 고초에 시달려온 우리들이였습니다. 죽음의 문턱을 딛고 선 페인중의 페인들이 바로 비전향장기수들이였던것입니다.
하지만 적들은 오산하였습니다. 고령의 나이에 돌아온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은 공화국의 품에서 정신육체적으로 자기 나이를 훨씬 넘게 살았습니다.
일생 돈더미우에 올라앉아 부귀향락을 누리는 백만장자, 억만장자들도 100살넘게 산다는것이 쉽지 않을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100살을 살았습니다. 앞으로 10년, 20년도 문제없을것 같습니다.
38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참혹한 감옥생활, 악착한 고문으로 페인으로, 살아있는 화석으로 되였던 내가 100살넘게 살았다고 하면 사람들은 쉽게 믿지 않을것입니다. 그것도 젊은이들 못지 않게 왕성한 혈기로 극장과 영화관에도 가고 지어 수영과 달리기도 하면서 젊음으로 질주하고있는 나의 모습을 적들이 보았다면 아마 깜짝 놀라 기절초풍할것입니다. 중학교에 다니는 우리 손녀애까지 할아버지의 이름은 당당히 세계기니스기록집에 올라야 할것이라고 우스개소리까지 할 정도입니다.
그러면 또다시 《동지애의 노래》구절이 떠오릅니다.
돌우에 피여나는 꽃은 그 정성 키운것이고
죽어도 잃지 않는 생은 그 사랑 주신거라네
…
꽃이 탐스럽게 피여나고 충실한 열매를 맺으려고 아무리 애써도 자기혼자서는 안되는 법입니다. 뿌리를 살찌울 비옥한 토양이 있고 따사로운 태양의 빛발을 받아야 가능한것입니다.
남쪽에 있을 때 페인이 되여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나를 지옥에서 락원으로 불러주시고 사랑의 한품에 안아 따뜻이 녹여주고 보듬어준 고마운 조국. 정녕 그 품은 고목과 같은 내 인생에 향기그윽한 꽃을 피워주고 열매를 맺게 하여 오늘에는 100살장수자로 만복을 누리도록 해준 내 삶의 영원한 《토양》입니다.
위대한 어버이의 품에 안겨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이 누리는 행복은 그대로 시이고 노래였습니다. 은혜로운 어버이품속에서 맞고보내는 하루하루는 격정없이 대할수 없는 기쁨과 환희의 련속이였습니다.
사회주의조국의 품에 안긴 순간부터 우리들의 건강과 생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돌리시며 주실수 있는 온갖 사랑과 은정을 다 베풀어주신분은 위대한 장군님이십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비전향장기수들이야말로 우리 혁명의 자랑으로 된다고 하시면서 우리들에게 혁명가, 애국투사의 고귀한 칭호를 안겨주시고 공화국영웅, 조국통일상수상자의 값높은 영예를 지니도록 해주시였습니다.
어버이수령님의 혁명위업을 실현하기 위한 성스러운 투쟁의 길을 신념과 의지로 빛내인 비전향장기수들을 모두 금방석에 앉히고싶다고, 우리가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하시며 비전향장기수들모두가 혁명가의 참된 삶을 변함없이 이어가도록 힘을 주시고 믿음을 주신 위대한 장군님의 사랑은 식어가던 우리들의 육체를 재생시킨 불사약이 되였고 고목에도 꽃을 피우는 생명소가 되였습니다.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위대한 장군님의 사랑까지 다 합쳐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을 극진히 보살펴주고계십니다.
나이가 많으면 면역력이 떨어져 쉽게 병에 걸리거나 젊었을 때 생겼던 질병이 도져 때없이 앓아 누울수 있다는것은 초보적인 상식입니다.
하지만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에게는 그것이 절대로 통하지 않습니다.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남조선에서 모진 고문과 박해의 후과로 질병에 시달려왔던 우리가 병을 모르고 장수할수 있도록 조국의 권위있는 병원들에서 정상적인 검진과 치료를 받고있는 정형에 대해 료해하시고 대책을 세워주고 계십니다.
해마다 금강산, 송도원과 같은 명승지들에 대한 료양길, 탐승길도 마련해주시고 마식령스키장과 양덕온천문화휴양지를 비롯하여 조국땅에 세계적인 문화휴양지가 일떠서면 제일먼저 비전향장기수들부터 불러주시여 즐거운 나날을 보내도록 하여주시는 우리 원수님이십니다.
비전향장기수들이 로당익장하여 통일애국투사로 인생의 영광을 빛내여나가도록 극진히 보살펴주시는 경애하는 원수님의 크나큰 사랑에 의해 우리들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탄생 100돐 경축행사와 제4차 전국로병대회, 조선로동당 제7차대회를 비롯한 여러 행사에 특별대표, 특별손님으로 참가하는것과 같은 최상최대의 특전도 누리고있습니다.
정녕 나를 비롯하여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이 영광과 행복의 최절정에서 보람찬 삶, 100살장수의 삶을 누리고있는것은 오직 숭고한 동지애와 혁명적의리의 최고화신이신 경애하는 원수님의 대해같은 은정을 떠나서 결코 생각할수 없습니다.
* * *
지금도 나는 《동지애의 노래》를 즐겨 부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부르고 저녁에 잠자리에 누워서도 부르며 산책할 때도 부르고 연회석상에서도 부릅니다.
그러면 동지애의 힘으로 신념을 지켜싸운 적구의 나날들이 떠오르고 먼저 떠나간 동지들이 자신들의 몫까지 합쳐 더 오래 살라고, 경애하는 원수님의 뜻을 받들어 통일애국의 길을 변함없이 걸어가라고 힘과 용기를 주는 목소리가 귀전에 울려옵니다.
…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가야 할 혁명의 길에
다진 맹세 변치 말자 한별을 우러러 보네
그렇습니다. 모진 시련과 난관이 앞을 가로막아도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은 언제나 경애하는 원수님을 우러러 보며 삶의 은인, 민족의 태양을 따라 꿋꿋이 걸어갈것입니다.
혁명적동지애의 최고화신이신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 계시여 이 땅에는 동지애의 력사가 영원히 흐를것이며 사회주의강국의 새 아침은 반드시 밝아올것입니다.
<저작권자 ⓒ 프레스아리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비전향장기수 한장호, 동지애의 노래, 38년 옥살이, 진실한 양심과 의리 관련기사목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