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2】 월북시인 김상훈의 장남이 쓴 아버지에 대한 추억
광복기 전위시인 중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진 김상훈은 1950년 6.25 동란 때 북행길에 올라 <조쏘친선> 기자로 일하던 류희정을 만나 결혼하여 슬하에 6남매를 두게 되었다.
북녘에서는 <풍요선집>, <력대시선집>, <가요집>, <리규보작품집>, <중국고전시선>을 펴냈고 유고시집 <흙>을 남겼다. 금년 초에는 미망인의 노력으로 김상훈 작품집 <통일을 불러>(327쪽)가 평양에서 출판되었다.
한편 남녘 땅에서는 2003년 경남/부산지역 문학회 주선으로 그의 고향인 거창 가조온천단지 시비공원에 김상훈 시비가 건립되어 그의 문학적 자산과 실천적 삶을 기리게 되었고, 때를 같이하여 <김상훈 시 전집>(337쪽)과 <김상훈 시 연구>(650쪽)가 발행되었다.
김상훈 시인은 말한다. "조선은 하나다! 나의 말은 한 평생 이 한마디뿐이다. 왜 사느냐고 누가 물으면 나는 서슴없이 대답하리라. 하나의 조국을 찾기 위해 사노라고..."
최근 김상훈의 장남 김종설이 아버지를 기억하며 <통일신보>에 게재한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5회에 걸쳐 여기에 연재한다.
아버지에 대한 추억 (2)
김 종 설(김상훈 시인의 맏아들)
푸름푸름 풋고추 다져서
열무김치 담그는 날은
뙈약볕도 정이 든다는데
자배기 가득 푸성귀 버물다말고
주름살 많은 어머니는
말없이 산마루를 바라보고있다
처마밑에 하나가득 제비들 우짖던 날
열무김치 와작와작 풋바심 보리밥을
그리도 맛나게 먹던 어깨둥실한 아들이 그리워
어머니는 소금항아리에 손을 넣은채
말없이 오솔길을 바라보고있다
퍼올려도 퍼올려도 끝없는 샘물처럼
사십년을 한대중으로 솟아오르는
그 짜고도 뜨거운 눈물이
눈시울에 고여서 부질없이 넘어날세라
어머니는 소스라쳐 머리를 흔드시고
어느새 조용한 눈길로
북녘하늘을 바라보고계신다
아버지가 쓴 《열무김치》라는 시다. 퍼올려도 퍼올려도 끝없이 솟구치는 샘물처럼 때없이 눈물이 솟아도 남이 볼세라 소스라쳐 놀라며 말없이 북녘하늘을 바라보실것만 같은 어머니… 아버지는 이 어머니를 계급이라는 말로 거부할수가 없었던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작가라는 의태를 포기하고 옛날 지주집장자로 키우려고 양아버지가 회초리를 들고 배워준 구한문을 민족을 위하여 유리하게 쓰리라 굳게 다짐하였던것이다.
만약 그렇게 아버지의 인생이 흘러갔다면 별로 행복하지 못한 생은 아니였다 하더라도 뭔가 손해본듯 한 인생인것만은 틀림없을것이다.
▲김상훈 시인의 가족사진(1985년)
그런데 아니였다. 아버지의 인생은 그야말로 축복받은 인생이였다.
당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전후복구건설을 위하여 자주 락원기계공장에 나가시군 하시였다.
《수령님, 복구건설은 념려마십시오.》라고 하던 락원의 10명당원들도 찾아가시고 전쟁의 상처로 몸부림치는 아픈 가슴들도 뜨겁게 어루만져주시였다.
바로 그 나날 어버이수령님께서 뜻밖에도 우리 아버지를 알아보시였다.
어딘가 낯이 익어보이는 사람! 아버지의 심장은 후두둑 높뛰였다. 중앙에 있을 때 한두번 큰 회의에 참가한적은 있어도 별로 눈에 뜨이게 토론 한번 해본적 없는 아버지를 우리 수령님께서 알아보신것이다.
그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아버지에 대하여 상세히 물으시고 믿음의 말씀도 하시고 차에 오르시였다고 한다.
솜처럼 부드러운 압록강바람이 고요히 아버지를 감싸안고있었다. 하늘에서
수천만개의 별들이 초롱불을 켜들고 내려온듯 강물우엔 작은 별들이 반짝이고있었다.
고즈넉한 그 저녁, 아버지는 울고있었다.
수령님을 생각하면
흐렸던 날씨도 밝아옵니다
차갑던 누리도 더워집니다
어버이수령님을 생각하면
눈속에서도 꽃이 핍니다
심장마다 기쁨이 넘쳐납니다
우리 집은 인차 평양으로 올라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멀리까지 바래주었다. 그들속에는 그때부터 수십년간을 두고 아버지와 편지교환을 한 《배추아저씨》들도 있었고 우리 녀자들이 좋아하는 《녀성은 꽃이라네》라는 가사를 써서 유명한 시인이 된 후에도 자기는 상훈선생의 제자라고 해마다 제사날을 잊지 않고 찾아주는 어제날의 로동청년 송남선생도 있었다.
행복!
인간의 행복이란 무엇인가? 살아갈수 있는 최소한의 물질적부? 그런 의미라면 아버지는 불행한 사람이 아니였다. 우리가 평양으로 올라왔을 때 국가에서 처음으로 준 집은 보통강구역에 있는 5층아빠트 3층 4호였다. 수세식시설이 갖추어져있는 두칸짜리 집, 부엌도 따로 있고 베란다도 있었다.
나는 그때 부러운것을 모르고 자랐다. 그때 1전이면 《말눈깔사탕》 한개였는데 10전어치만 사면 작은 손으로 다 쥘수가 없었다. 그런데 우리 집 알사탕통안에는 5원짜리, 10원짜리가 수두룩했다.
물론 내 손이 닿지 못하게 높은데 올려놓았지만 아빠, 엄마가 없을 때 여러가지 가구들을 리용하면 거기까지 기여오르는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당시 민주선전실 실장을 하던 어머니도 그런덴 통 관심이 없었다.
그때 한방은 아버지의 서재였고 한방은 생활방이였는데 서재엔 아빠트적으로 우리 집에만 있는 용수철식 안락의자가 다섯개 있었다.
가운데 원탁을 빙 둘러 안락의자를 놓고 벽은 책으로 꽉 채우고 사는것이 아버지의 리상이였다. 그 귀물같은 의자를 4층 8호집에 두개나 거저 주었다. 세대주가 허리를 다쳤기때문이였다. 혹 곤난한 사람들이 있으면 어머니를 찾아왔고 찾아오지 않아도 낡은 치마를 입고다니는 동네사람들이 있으면 아버지가 치마라도 한감 사주라고 일러주군 하였다.
그땐 다 그렇게 살 때였다. 베란다창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집집마다 동태두름이 매달려있었고 채과상점에선 과일이 썩을가봐 걱정이고 식료상점에선 사탕이 녹아내려서 야단이였다. 나같이 세찬 아이들이 아빠트밑 들메나무에 가득 절여말리우는 동태 두어두름쯤 뚝 떼가서 구워먹는것은 어른들이 욕도 안하던 시절이다.
아빠트에서 텔레비죤도 우리 집에 제일먼저 생겼다. 동네아이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는데 누나가 질색하다 아버지에게 여러번 욕을 먹었다. 아버지는 방안에 가득차고 현관에 가득차고 복도에까지 가득찬 아이들을 앉히고 자기는 서재에서 원탁을 꺼내다 그우에 틀고앉아 텔레비죤을 보았다. 그때 우리 집엔 작은 발풍금도 있고 녀동생이 삑삑거리던 바이올린도 있었으니까 초보적인 생활조건은 훨씬 지난 수준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느 뒤구석엔 토굴집이 있을 때였지만 아버지는 놀라운 생활조건을 보장받고있었다. 아버지가 있던 창작실에는 박산운선생도 있었고 남조선에서 이러저러한 곡절을 거쳐 북으로 온 작가, 시인들이 거의 전부를 이루고있었다. 크지는 않았지만 대우는 높았다. 말하자면 어버이수령님께서 아버지같은 사람들의 진짜보호자가 되시여 보살펴주신것이다.
거기서 아버지는 민족고전문학과 《두보시선》을 비롯한 중국고전문학번역도 하였고 많은 시도 썼다. 작가동맹 맹적이 해결된것은 물론이다. 높은 대우를 받는데다 수많은 번역, 창작물들의 원고료까지 받으니까 정말 살림이 넉넉하였다. 아버지는 귀여운 자식들의 손목을 하나씩 나누어잡고 어머니와 함께 극장에도 가고 영화관에도 갔다.
식당에도 자주 갔다. 그러다나니 신의주에 있을 때처럼 어디서 모여오는지 양말대님을 맨 령감쟁이들이 다시 우리 집 안방을 차지했다. 열심히 보풀이 난 한자책을 뒤지며 필사를 하다가 한잔 마시고나선 이상한 소리를 뽑아대군 하였는데 후에 알고보니 판소리였다. 나는 그게 너무 지겨워서 아버지가 그렇게 배우라는 한문을 끝내 안배웠다. 《필사료》, 《풍물놀이값》, 《접대비용》 그 모든것이 우리 집에서 나간건 틀림없다. 아버지에게는 그 이상의 넉넉함이 필요없었던것이다.
그때 아버지는 행복했을가? 난 아니다라고 여기에 감히 써넣는다.
아버지는 행복하지 못했다.
무엇일가 이것이 무엇이길래
이다지도 사람들을 긁으며 괴롭힐가
잊자고, 잊자고 몸부림을 쳐보았다
하늘이 갈라져도 살아난다는데
땅우에 그어놓은 금, 조 금 하나가 무엇이길래
한생을 울화속에 파묻혀야 하느냐
안타까운 삶을 움켜쥐고
끊어던져 던져버리자고
지난날을 매몰스레 떠밀어보았건만
바람처럼 밀물처럼 호곡처럼 속삭임처럼
엄한 부모님의 목소리처럼
끊임없이 밀려오고 밀려오는 그리움
이것이 진정 무엇일가
수억만개 세포로 촘촘히 이루어진
우리의 살이, 우리들의 피가
순간도 멈춤없이 쉬임없이 부르는
분렬의 아픈 숨소리
이것이 정녕 무엇일가?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내가 한 열서너살 나던 때의 어느 일요일에 어머니가 신의주에서부터 끌고온 고리짝을 헤쳤는데 거기에는 우리 집식구들에겐 전혀 필요없는 새옷들이 정성스레 쌓여있었다. 이게 무엇인가고 물으니 아버지가 천만뜻밖에도 남조선에 있는 네 형, 네 누나들의 옷이라고 했다. 당황한 순간이였다. 전혀 몰랐던 일에 부닥친 나는 한동안 갈피를 잡을수가 없었다. 때마침 그때 라지오에선 남조선의 악질경찰이 나오는 아동방송극 《이돌이와 삼돌이》가 흘러나오고있었다.
《형, 누나들은 거기서 뭘하나요?》
어색한 목소리로 떠듬거리며 묻는 나에게 아버지가 대답했다.
《모르겠다. 아마 경찰이 됐을수 있겠지. 그럼 넌 어떻게 하겠니?》
《총으로-》하다 말고 《차라리 죽었으면-》 하는 순간 의자가 날아왔다. 머리가
터졌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우리 아버지가 의자를 들어 아들의 머리를 깠다. 상처자리가 남아있을만큼 사정없이 깠다.
《넌 지금까지 얼마나 내 속을 태웠니? 그 애들은 내 손으로 코 한번 못 닦아준 아이들이다.》
아버지는 피흘리는 아들을 내버린채 그 길로 집필실로 나가셨다.
한달이 넘게 들어오시지도 않았다. 하늘이 통채로 무너지면 그땐 어떨가? 나는 오래오래 좀처럼 그치지를 못하고 자꾸만 자꾸만 울었다.
《가엾은 아버지, 그때 아버지의 가슴이 얼마나 터졌겠습니까, 지금 또 한번 아버지에게 용서를 빕니다. 그리고 이 못난 동생에게 아버지를 빼앗기고 어언 70고개를 넘어설 형님, 누나들, 꿈에도 불러보고싶은 종철, 종식, 종국형님들과 경애, 경숙누님들에게도 용서를 빕니다.》(계속) <저작권자 ⓒ 프레스아리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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