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경도선에서의 군용렬차 습격전투
박성철
장춘ㅡ도문사이철도는 일제시기에는 경도선이라고 하였다. 당시 이 철도는 일제의 만주강점을 영구화하며 만주를 쏘련침략의 병참기지로 만드는데 중요하게 리용되고있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수많은 병력과 군수물자들을 이 경도선을 통하여 수송하고있었다.
그러므로 일제의 중요한 군용철도의 하나인 경도선을 습격하여 적들의 수송체계에 혼란을 일으키는것은 군사, 정치적으로 큰 의의를 가지고있었다.
1935년 봄 요영구에서 진행된 군정간부회의에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제시하신 방침에 따라 우리 독립사 제1련대는 멀리 무송현 등지에까지 활동구역을 넓히면서 적들에게 계속적인 타격을 주고있었다. 이렇게 도처에서 적들의 간담을 서늘케하고있던 우리 부대는 경도선에서 적군용렬차를 습격할것을 계획하였다.
전투를 앞두고 면밀한 준비를 하였다. 렬차를 습격할 방법에 대하여 토론한 결과 우리는 습격하기전에 우선 철길을 파괴하여 기차를 탈선시키는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리하여 파괴조에 망라된 동무들은 철길을 파괴할 나사틀개, 못뽑이, 지레대 등을 연길현 로두구에 가서 얻어왔다. 한편 우리는 계속 대중적지혜를 발동시켜 렬차습격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연구하였다.
이와 같이 면밀한 준비를 갖춘다음 1935년 5월 우리 부대는 처창즈유격구를 출발했다. 부대는 최현동지가 지휘하게 되였다. 우리는 돈화와 교하사이에 가로놓인 밀림속을 뚫고 행군해갔다. 길 아닌 길을 헤치고나아가는 밀림속행군은 더디고 어려웠으나 적들의 눈을 피하기에는 좋았다. 신출귀몰의 전술로 그 렬차를 습격하기 위해서는 적들에게 어떠한 단서도 잡혀서는 안되였다.
며칠후에 우리는 경도선 황송전부근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우선 습격하기 유리한 지점을 선택하였다. 우리가 선택한 지점은 깎아세운듯이 가파로운 산옆이였다. 철길은 그 산옆을 돌아지나갔는데 급한 구배를 이루고있었다.
철길이 놓인 산옆은 산림이 우거졌는데 철길 바로 아래우의 나무들은 이리저리 자빠져있었다. 적들은 우리의 행동을 방해하려고 이렇게 되는대로 나무를 베여 방책처럼 만들어놓은것이다.
최현동지는 이미 계획한대로 방어조는 돈화와 교하량쪽에 배치하고 기관총로획조와 습격조, 파괴조는 철길로부터 조금 떨어진곳에 배치했다. 기관총로획조를 따로 조직한것은 당시 적들이 유격대의 습격을 막기 위해 렬차뒤켠에 기관총을 가진 장갑차를 달고다녔는데 그것을 빼앗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적들은 렬차의 뒤에만 장갑차를 달고다닌것이 아니라 렬차의 앞에도 또 하나의 장갑차를 앞세웠다. 이것은 렬차가 통과하기전에 미리 철길의 안전성을 확인하기 위한 수작이였다.
유격대의 활동에 겁을 먹은 적들은 이처럼 한개의 렬차를 운행하는데도 삼엄한 경계조직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김철진중대장이 인솔한 5명의 파괴조는 재빨리 철길에서 못을 뽑았다. 장갑차는 못을 뽑아놓아도 탈선하지 않는다.
렬차를 습격할 만단의 준비가 되였다. 우리는 렬차가 오기만 기다렸다.
새벽 1시경이였다. 돈화쪽으로 5리밖에 나가있는 신호병에게서 장갑차가 온다는 신호가 왔다. 우리는 온몸의 신경을 두눈에 모으고 그곳을 주시하였다. 얼마안가서 산모퉁이로부터 환한 불빛이 보이더니 경비용장갑차가 나타났다. 우리는 전호에 엎딘채로 숨을 죽이고 그놈이 지나가기만 기다렸다.
장갑차는 빠른 속도로 달려오더니 바람을 일으키며 우리앞을 지나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장갑차를 통과시키자 김철진중대장은 파괴조원들을 데리고 잽싸게 뛰여나가 이미 못을 뽑은 레루를 들어 옆으로 옮겨놓았다. 이 모든것은 순식간에 진행되였다. 사위는 또다시 아무일도 없은듯 깊은 정적에 잠겨버렸다.
긴장된 시간이 얼마동안 더 흘렀을 때였다. 신호병은 다시 군용렬차가 나타났다는것을 알려왔다. 우리들은 총가목을 으스러지게 틀어쥐고 렬차가 나타날 산모퉁이쪽을 주시하였다. 밤의 정적을 깨뜨리며 레루가 울리는 소리가 점점 요란해지더니 경비용장갑차가 나타나던 산모퉁이로부터 기관차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관차뒤에는 불빛이 환한 차량들이 련이어 달려오고있었다. 불빛으로 보아 우리는 그것이 화물차가 아니라 적병들을 태운 특별렬차란것을 인차 알게 되였다. 눈앞에 벌어질 통쾌한 광경을 머리에 그리면서 나는 더욱더 으스러지게 총가목을 틀어잡았다. 렬차는 곡선을 돌아서자 빠른 속도로 달려내려오고있었다. 장갑차가 지나간 뒤라 기관사는 마음놓고 렬차를 모는 모양이였다.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한초한초 기다리던 최현동지는 렬차가 사격권내에 들자 일제사격을 명령하였다. 어둠속에서 터져나온 불의의 사격을 받으면서 차량들이 서로 요란하게 충돌하더니 마치 큰 바위라도 굴듯이 기관차가 철길옆으로 나딩굴었다. 순간 화통에서 쏟아지는 불빛이 확 피여올랐다가 사라졌다.
기관차 바로 뒤에 달린 두개의 차량도 련달아 넘어졌다. 그러나 그 뒤차량들은 서로 충돌하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더니 그 자리에 멈춰섰다.
차량들의 불빛이 일시에 꺼지고 주위는 먹물을 뿌려놓은듯이 캄캄해졌다. 옆으로 넘어진 두개의 차량에서는 찢어지는듯 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뒤차량들은 잠잠하였다. 아마 거기에 탄 놈들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양이였다.
습격조원들은 총을 쏘면서 날쌔게 렬차에 달려들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적들이 차안으로부터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이때 렬차 맨뒤에 달린 장갑차에서도 기관총이 짖어대기 시작하였다.
습격조원들은 멈춰선 렬차에 접근하여 창문안으로 수류탄을 던졌다. 일부 동무들은 넘어진 차량에 들어가 살아남은 놈들을 포로했다. 우리는 포로된 놈들로부터 그것이 장교들만 탄 특별렬차란것을 알았다. 유격대원들은 더욱 사기충천하여 사격하며 수류탄을 집어던졌다.
차량으로 날아드는 수류탄을 막아보려고 적들은 해빛을 가리우는데 쓰는 살창문까지 내려놓았다. 놈들은 달팽이처럼 차안에 들어박혀 최후발악을 하였다. 전투는 계속되였다.
이때 내가 책임을 진 기관총로획조는 장갑차밑으로 접근하였다. 장갑차안에 들어박힌 적들은 옆으로 난 화구로부터 기관총신을 절반쯤 내밀고 미친듯이 쏘아대고있었다. 그놈의 기관총을 빨리 까부셔야 하였다. 그래야만 우리 습격조원들이 마음놓고 렬차안의 적들을 섬멸해치울수 있었다.
나는 화구에 수류탄을 집어넣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구멍으로는 수류탄이 들어가지 않았다. 분초를 다투는 이 시각에 더 무엇을 오래 생각할수 있었으랴. 나는 발돋움을 하고 기관총을 끌어당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키가 모자랐다. 나는 다시 총창으로 걸어당겼다. 그래도 기관총은 나오지 않았다. 적들은 그동안에도 사격을 멈추지 않고있었다.
나는 저으기 초조해졌다. 그놈의 기관총을 빼앗지는 못할망정 까부셔야만 전우들의 활동을 보장할수 있지 않겠는가.
장갑차안으로 들어가려고 해도 문을 닫아걸었기때문에 들어갈수가 없었다. 그리고 두터운 철판으로 뒤덮인 장갑차의 측면은 보병총탄으로는 꿰뚫을수도 없었다.
여러가지로 생각하던 끝에 나는 장갑차밑으로 올리쏘면 탄알이 들어가리라고 생각하고 조원들과 함께 장갑차밑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적들이 자리잡고있으리라고 생각되는 모퉁이를 겨누어 올리쐈다. 《으악!》하는 비명이 들려왔다. 우리는 계속 쐈다. 그러자 탄알을 피해 이리저리 몰리는 적들의 발자국소리가 마치 천장에서 달려다니는 쥐소리와 같이 들렸다.
전멸의 위험에 처하게된 적들은 장갑차밑창을 뜯어내고 그리로 기관총을 쏘았다. 적탄에 우리 동무가 한명 부상을 당하였다. 사태는 위급하게 되였다. 그러나 나는 장갑차에 대한 사격은 잠시도 멈출수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사격을 중지한다면 적기관총화력은 또다시 우리 습격조에로 돌려질것이기때문이였다. 그러기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놈의 기관총화력을 계속 장갑차밑으로 끌어당겨야만 하였다.
나는 조원들과 함께 렬차바퀴에 몸을 의지하고 계속 장갑차밑창으로부터 올리쏘았다. 우리의 화력에 겁을 먹은 적들은 꼼짝 못하고있었다. 그리하여 기관총화력에서 벗어난 습격조원들의 활동은 한결 자유로와졌다.
이렇게 전투가 격렬하게 진행되고있을 때 교하쪽에서 갑자기 환한 불빛이 비치며 요란한 기관총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먼저 지나간 장갑차가 뒤에 렬차가 따라오지않으므로 되돌아올라온것이였다. 장갑차는 조명등을 환하게 비치면서 올리사격을 했다. 그러나 거리가 멀어서 적탄은 명중하지 못했다. 렬차가 전복되자 우리 파괴조원들이 이미 량쪽 궤도를 파괴해놓았기때문에 장갑차는 가까이 다가올수 없었던것이다.
이때 반대켠으로부터 또 하나의 장갑차가 나타났다. 그것 역시 우리를 향해 미친듯이 사격을 하였다.
이 이상 더 전투를 계속할 필요가 없다고 인정한 최현동지는 사격중지명령을 내렸다. 사격이 멎자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적들의 비명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그것은 마치 함정에 빠진 승냥이무리들이 단말마적인 울부짖음과도 같았다. 우리는 그 울부짖음이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전면적인 패망의 통곡소리로 변할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굳게 확신하면서 전투장에서 철수하였다.
부대는 예정된 장소에 모이자 포로들을 끌고 산으로 올랐다. 전과를 종합한 결과 적들은 장교들만 700명가량 렬차에 탔었는데 이날밤 300여명이 죽었다는것이 판명되였고 포로는 11명이였다.
그리고 권총 10여정, 싸창 5정을 로획하였고 현금 20만원을 몰수하였다.
우리는 이와 같이 대전과를 거두고 목적지를 향해 행군을 했다.
후에 들은 정보에 의하면 이 렬차습격으로 말미암아 적들내부에는 대혼란이 일어났다는것이였다.
적들은 아무도 모르게 떠난 특별렬차가 습격당한것으로 보아 자기들 내부에 필시 유격대와 련계를 맺은 공작원이 숨어있다고 떠들어대면서 서로 밝히느라고 눈이 뒤집혀 돌아쳤다는것이였다.
그후 우리는 도처에서 적의 군용렬차를 습격했다. 군용렬차습격은 적들의 인원과 물자에 손실을 주어 놈들을 공포에 떨게 한 거기에만 큰 의의가 있는것이 아니라 인민들에게 우리 조선인민혁명군의 위력을 보여주며 그들을 반일전선에로 튼튼히 묶어세움에 있어서도 실로 커다란 의의를 가지고있었다.
28. 대황구에서
김좌혁
적군을 내부로부터 동요시키고 와해시키며 그들을 우리편에 의거시키는 사업은 항일무장투쟁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있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당시 적군와해공작의 중요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항일민족해방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서는 로동자, 농민, 인테리 및 기타 각계각층 인사들을 반일통일전선에 집결하여 항일구국운동에 총궐기시킬뿐만아니라 놈들의 기만과 강제에 의하여 징모된 적군내부 특히 위만군내 하층병사들에 대하여서도 대대적인 와해공작을 진행하여야 합니다. 위만군 하층병사들은 그 절대다수가 빈농민 혹은 그들의 자제들로써 구성되여있습니다. 수많은 빈고농들로 구성된 병사대중을 우리 편에 쟁취하는 문제를 홀시하여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총탄으로 적을 죽이는것만으로써는 승리할수 없습니다. 전체 조중인민은 물론 적군내 병사대중까지도 우리의 불구대천의 원쑤인 일제에 대한 증오심과 항일구국사상을 가지도록 선동하여 그들로 하여금 항일구국위업에 총궐기할 태세를 갖추도록 하는것이 중요합니다. 때문에 적군을 내부로부터 와해시키며 그들을 의거케하는 사업은 우리의 반일민족해방투쟁에 있어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있습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이와 동시에 적군와해공작에 대한 실천적방법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교시하시였다.
견결하고 용감하고 총명하며 기략에 능한 동지들을 선발하여 대담하게 적군내에 침투시켜 공작케 할것.
로동자, 농민, 인테리출신인 위만군병사와 하급군관들에게 편지를 전달할것.
신문, 포스터, 혁명서적 등을 그들에게 보내여줄것.
적 하급군관 및 병사들의 가족과 친척 및 친우들을 리용하여 선전공작을 진행할것.
그리고 그들과 교전하게 될 때에는 《너희들은 누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가?》, 《너희들의 조상은 중국사람이 아닌가?》, 《우리는 중국사람을 치지 않는다.》, 《무엇때문에 일본놈의 총마개로 죽는가?》, 《총을 바치면 목숨을 살려준다!》, 《조중인민은 단결하여 공동의 원쑤일제를 타도하자!》등의 구호를 사용할것.
이러한 방법으로 진행된 적군와해공작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1935년 8월 15일에 위만군 제2군구에서 정부에 보고한 서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여있다.
《최근 만주국군에 대한 김일성의 활동은 상당한 주효를 가져와서 병사들은 물론 일부 만인장교들까지도 동요하고있으며 기회를 보아 병변을 일으키고 전기 김일성이와 합류할 위험성이 농후하며 … 지난 7월 5일 화전현 제 5구국군 병사 350명은 련장(중대장)외 장교 8명을 살해하고 체코식중기관총 2정, 경기관총 6정, 보병총 220정, 권총 12정, 탄약 51,786발을 휴대하고 남방으로 도주하여…》
이것을 보더라도 적군와해공작이 적들에게 심대한 위협과 타격을 주고있음이 명백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위만군이나 경찰대가운데서 악질적이 아니고 은근히 인민들과 아군을 동정하려는 부대와는 커다란 전략적의의가 없다면 될수 있는대로 전투를 피하고 정치공작으로 그들을 의거시키며 인민들과 아군에 대하여 완고하고 결사적으로 대항하려는 악질적인 적군에 대해서는 적아간 력량대비를 정확하게 타산한 기초우에서 견결하고 적극적인 방법으로 놈들을 괴멸시킬것입니다. 그러나 아군에게 생포된자들에 대해서는 갖은 방법으로 우대하여 모두 놓아보낼것입니다. 이렇게 하여야만 위만군으로 하여금 아군은 일제놈들과 놈들의 충실한 주구들과만 싸우고 진실한 중국사람과는 싸우지 않는 진정한 애국적혁명군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할수 있습니다.
또한 포로된자들을 우대함으로써 위만군은 아군과 전투가 벌어지게 되면 싸우지 않고 인차 포로될것이며 그들은 아군의 무기수송대로 될것입니다.
1935년 3월, 조선인민혁명군 제4련대는 위대한 수령님의 이러한 적군와해공작에 대한 교시를 충실히 집행함으로써 훈춘현 대황구에 주둔한 위만군의 와해공작에 성공하였다.
그때 대황구에는 위만군 1개 중대(110여명)가 주둔하고있었는데 우리의 정치공작이 추진된 결과 이미 하층에서는 적지 않은 동요가 일어나고있었다. 대황구 위만군중대에는 위만군 하사관으로 있는 우리의 공작원 2명이 들어가있었던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적극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지도관》놈과 반동장교들의 폭압과 아직 각성하지 못한 일부 병사들의 우유부단한 태도 등으로 말미암아 우리 공작원들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있었다.
때문에 아군지휘부에서는 공작원들에게 위만군병사들의 민족적각성을 높이며 상하부간의 계급적갈등을 첨예화시키며 그들에게 우리 투쟁의 정당성을 잘 인식시켜 빠른 시일내에 우리에게로 넘어오도록 더욱 적극적으로 공작을 추진시킬데 대한 임무를 거듭주었다.
그런데 하루는 우리 공작원들에게서 대황구에 주둔하고있는 위만군중대가 곧 다른데로 이동하게 된다는 련락이 왔다.
그리하여 아군지휘부는 비록 열매가 익지는 않았어도 기회를 놓치지 말고 그 열매를 따야 한다는 결심을 택하게 되였다.
아군지휘부는 대황구주둔 위만군을 와해시키기 위한 주도면밀한 준비를 갖추었다.
그런데 대황구에 주둔한 위만군병사 3명이 때마침 우리에게로 의거하여왔다. 그들은 우리 공작원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였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것이였다.
《이번에 우리는 사냥을 나왔었습니다. 우리는 일제놈들이 나쁘다는걸 들어서 알고는 있었으나 이번처럼 똑똑히는 몰랐댔습니다.
사냥가는 도중에 우리는 일제놈들이 마을집들을 몽땅 불지르는것을 보고 우리의 원쑤는 정말 일제놈이구나 하는것을 똑똑히 알게 되였습니다. 유격대가 참말 옳았다는것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는 그 더러운 총을 메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장교놈들이 이때까지 우리를 속여온것을 생각하니 분합니다. 우리는 어리석었습니다. 다시는 그놈들의 편에 서지 않으렵니다. 당신들과 손잡고 일제놈을 반대하여싸우겠습니다. 그래서 찾아왔습니다. 우리 동료들중에는 우리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열렬히 환영하였고 따뜻하게 대하여주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공동의 원쑤인 일제를 타도하기 위하여 손을 잡고 싸워야 한다는것을 해설해주었다.
그들의 의거는 우리들에게 적정을 더욱 구체적으로 확정할수 있게 하여주었다.
우리는 대황구에 있던 일본군《지도관》놈이 훈춘으로 출장가고 없다는것도 알게 되였다. 기회는 좋았다.
드디여 1935년 3월 19일 우리 제4련대 약 120여명의 대원들은 진창을 떠나 대황구에로 향하였다.
우리는 북황구령을 넘어 다음날 대황구의 북쪽 약 20리 지점인 양목촌에 이르렀다. 지휘부에서는 여기서 우리들에게 전투시의 주의사항에 대하여 일일이 말해주었다.
특히 이번 전투는 다른 전투와 달리 위만군을 포위하여 와해시킨 다음 그들로 하여금 우리와 함께 구국의 길에 나서게 하자는것이며 그러기 위하여서는 먼저 우리의 위력을 시위하여 적을 압도한 다음 함화로써 정치선동을 하여야 한다는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사격은 어디까지나 위협사격이여야 하며 피치못할 경우라 할지라도 장교들과 병사들을 엄격히 구분하여 사격대상을 정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각 중대들의 배치지점과 전투임무는 하달되였다.
부대는 3월 21일 새벽에 대황구에 도착하자 각각 지정된 지점들을 차지하였다. 지휘부는 대황구 북쪽고지의 그리 높지 않은 중턱에 위치하였다. 각 중대는 적병실을 완전히 포위하였으며 적증원부대를 경계하였다.
이리하여 우리 부대들은 적위만군병실을 물샐틈없이 완전히 포위하였던것이다.
우리는 고도의 긴장성과 은밀성을 보장하면서 전투개시시각을 기다리고있었다.
새벽 5시경이였다. 적보초병 한명이 총도 메지 않은채 병실뒤 언덕배기에 있는 보초막으로 올라오고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자는 보초막을 비우고 병실에 내려가 온밤 도박을 하다가 그제야 올라오는 길이였던것이다.
아군지휘부쪽에서 《서라!》하는 웨침소리가 났다. 그러자 보초는 금시에 자라목이 되여서 비명을 치더니 벼랑진 언덕아래로 딩굴어떨어졌다. 이 소동에 놀란 병실안의 적들이 밖으로 쏟아져나왔다.
우리는 위협사격을 함으로써 우선 적을 압도하였다.
적들은 병실에서 뛰여나오자 우리에게 총질을 하였다. 적소대장놈은 우리를 향해 《할려면 하자!》라고 호통을 치면서 어리석게도 대응사격을 해왔으나 잠시후에는 우리의 위압사격에 의하여 독안에 든 쥐처럼 어쩔바를 몰라하였다. 적들의 사기는 점점 죽어들어갔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적들중에서 동요하고있는 층을 끌어당기며 장교층을 제압하여야 했다.
우리는 일단 사격을 중지했다. 그리고 적병실을 포위한채로 산언덕에서 함화로써 정치선동을 들이댔다.
갑자기 총소리가 멎고 산언덕에서 구호를 웨치는 소리가 나자 적들은 모두 어리둥절하여 우리들이 있는 산언덕쪽을 올려다보았다.
《너희들은 우리의 원쑤가 아니다. 우리의 원쑤는 일본침략자들이다. 우리와 함께 일본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싸우자!》, 《총을 놓고 의거하여나오라!》, 《우리는 중국인을 치지 않는다!》
우리는 이렇게 계속 웨쳤다.
적들은 《사격하지 말고 말로 하자.》고 요청하여왔다.
우리는 《대표를 보내라!》고 웨쳤다.
적대표 2명이 우리의 지휘처까지 올라왔다. 그들은 자기들의 내부사정을 솔직하게 고백하였다. 즉 대부분은 의거하자는 의견이나 일부는 계속 싸워보자는 주장이 있어 서로 의견이 대립되고있다는것이였다.
우리 지휘부에서는 이 말을 듣자 곧 대담하고 기략에 능한 동무로써 대표 2명을 선출하여 그들과 함께 적병실로 보냈다.
대표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조직의 위임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는 굳은 마음으로 대담하게 적들속에 들어갔다.
우리 대표들은 적들과 담판을 진행할 때에 위만군들앞에서 열렬한 어조로 선전해설사업을 시작했다.
《여러분! 당신들은 우리의 형제들입니다. 우리 두 나라 백성들은 똑같이 일본침략자들의 잔악한 쇠사슬에 얽매여 허덕이고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두 나라 형제들은 서로 손을 맞잡고 공동의 원쑤인 일제놈들을 쳐부셔야 합니다. 일제놈들은 간교하고 악독합니다. 그놈들은 우리 형제들이 서로 손을 잡고 싸우는것을 제일 무서워 합니다. 그래서 놈들은 우리들사이를 멀게 하고 형제들끼리 서로 피를 흘리게 하고 심지어는 중국사람들끼리도 서로 싸우게 하여 무고한 백성들의 피만 흘리게 합니다.
여러분, 형제들!
우리들의 부모처자들을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우리 조국과 당신들의 귀중한 동북땅을 그 악독한 왜놈들에게서 다시 찾기 위하여 우리는 손을 굳게 잡고 싸웁시다!》
우리 대표의 열렬한 선전을 듣자 《옳소! 옳소!》하고 웨치면서 이미 우리들에게서 정치적영향을 받은 위만군 하층병사들이 우리에게로 나섰다.
그러나 장교들을 비롯한 일부 병사들은 우리 대표의 말을 리해할수 없는듯 고개를 가로젓고있었다. 그것을 포착한 우리 대표들은 재삼 인내성있게 선전을 계속하였다.
마침내 그들의 절대다수가 자기들의 지난날을 진심으로 뉘우치면서 우리 유격대와 손을 잡고 싸우겠다고 결의하였다.
처음부터 우리의 제의를 거절하던 대지주의 아들인 중대장의 부관놈도 압력에 눌리여 마지못해 동의했다.
우리는 예견한 목적을 달성할수 있었다. 우리의 전부대는 위만군운동장에 집결하였다. 우리는 이때 적들에게 총을 그냥 메운채로 정렬시키고 다시한번 해설사업을 진행하였다. 결과 그들은 자기들의 민족적처지를 개탄하면서 모두들 우리와 함께 항일하겠다고 맹세하였다.
주변인민들은 아침식사를 지어가지고 우리 조선인민혁명군을 환영하였으며 도로닦이에 강제로 동원되였던 로동자들과 농민들 수십명은 우리가 로획한 군수품을 자진하여 지고서 우리 부대와 함께 길을 떠났다.
우리 부대들은 오전 11시경에 양목촌을 향하여 개선의 길에 올랐다.
한편 내가 속한 제1중대와 제4중대는 계속 새로운 전투임무를 받아가지고 훈춘방향으로 진출하였다.
우리 부대들은 대황구에서 넘어온 위만군 115명을 우리 대렬에 편입시켰다. 그중에는 전투시에 복부를 부상당한 위만군 소대장도 있었는데 우리 부대의 군의 리봉수동지는 그를 잘 치료하여주었다. 그리하여 그 소대장은 우리 유격대의 고상한 인도주의에 감화되여 그후 우리와 함께 용감히 싸우게 되였다.
대황구에서 우리 대오에 편입되여 3개 중대로 편성된 그 병사들은 그후 악질적인 《정안군》을 격멸소탕한 로흑산전투에서 용감히 싸웠으며 왕청현 태평구에서는 로흑산전투에서 로획한 박격포로 적에게 명중사격을 들씌워 위만군부대를 통쾌하게 무찌르는 위훈을 세웠다. 그리고 이밖의 수많은 간고한 전투들에서 그들은 우리와 함께 끝까지 잘 싸웠다.
실로 대황구에서의 승리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적군와해공작에 대한 교시의 정당성을 다시한번 시위한것으로 된다. 우리는 이 전투를 통하여 심지어 일제에게 리용당하던 적군병사대중까지도 능히 우리와 함께 항일구국위업을 수행할수 있으며 반일력량으로 전변시킬수 있다는 신심을 더욱 확고히 가지게 되였다.
이 전투가 있은후 광범한 위만군 하층병사들가운데서는 자기들의 민족적처지와 계급적립장을 점차 깨닫기 시작하고 우리에게 개별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의거해오는 일이 빈번하였다.
이것은 반일력량을 더욱 강화해야 할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정치, 군사적으로 큰 리득이였으며 일본침략자들에게는 더없는 타격으로 되였다.
이후부터는 교전시에 위만군 병사들중에서 싸우지 않고 포로되여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실례는 허다하다. 위만군중에는 조선인민혁명군을 신뢰하고 동정하여 일제의 감시를 피해가면서 아군에 무기, 탄약까지도 보내준 사실이 적지 않았다. 전투중에 있어서도 우리 대원들은 일본군과 위만군이 아군을 향하여 진격하여오면 우리는 총구를 일본놈들에게만 돌리여 집중사격하고 위만군에게는 총을 쏘지 않고 《입대포》(당시 함화를 부르는것을 《입대포》라고 하였다.)를 쏘아 대항치 않도록 하였다. 결과 그들중 량심이 있는 병사들은 일제놈들의 감시를 피해가면서 헛총을 쏘기도 하였고 어떤 병사들은 일본군의 정보를 아군에게 알려주어 사전에 우리가 준비하게 함으로써 위기를 면하게까지 한 일도 적지 않았다.
이와 같이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교시에 기초한 적군와해공작은 항일유격전쟁에 있어서 중요한 사업이였으며 그것은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저작권자 ⓒ 프레스아리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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