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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개처럼, 노예처럼 살 것인가?

김의기 유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

프레스아리랑 | 기사입력 2023/05/31 [11:18]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개처럼, 노예처럼 살 것인가?

김의기 유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

프레스아리랑 | 입력 : 2023/05/31 [11:18]

김의기는 1959년 경상북도 영주의 농민가정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가족들의 기대 속에 서울 유학을 다녔는데 1976년 서강대학교 무역학과에 입학했다. 그가 대학을 다니던 때는 유신정권 아래에서 민주화 요구가 강해지던 시기였다.

 

또 그 자신이 농민의 아들인지라 자연스레 농민운동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김의기는 하계 농촌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농업문제연구모임에도 적극적이었다. 또 감리교청년회(감청) 전국연합회 농촌선교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으며 모교에서는 학생들과 근대사도 연구했다. 무산되기는 했지만 학내시위를 계획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농민운동에 적극적인만큼 그는 늘 농민을 생각했다. 누나의 증언에 따르면 김의기는 대학 입학 기념으로 사준 양복도 입지 않았는데 그 이유를 묻자 "사람이 편하면 점점 더 편하고 싶어져서 도둑 같은 마음이 생긴다"고 답했다고 한다.

 

김의기는 19803월부터 전남지방의 농촌과 서울을 오가며 농촌활동 자료집을 발간하기 위해 힘썼다. 그러던 중 '함평 고구마 농민 투쟁 승리 기념식'에 참여하기 위해 다른 농민, 농민운동가들과 함께 광주를 방문했다. 그런데 그 날은 519, 계엄군의 만행이 백주대낮에 펼쳐지고 있었다. 김의기는 이 광경을 보고 충격에 빠진다.

 

이 날 기념식에 참여한 사람 중에는 농민회 활동을 하며 그와 안면이 있었던 동화작가 윤기현이 있었다. 윤기현은 김의기에게 "지금은 계엄군에게 맞서 싸우는 것보다 광주가 고립되지 않도록 상황을 외부에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고, 이 말을 들은 김의기는 서울로 올라와 광주의 현실을 알리고자 했다.

 

1980530일 서울 종로5가 소재 기독교회관에서는 금요기도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이곳에서 김의기는 광주의 진상을 밝히기로 했다. 하지만 기독교회관은 자주 시위가 있던 곳인데다 그날은 시위를 예상하여 일방통행마저 금지시킬 만큼 경계가 삼엄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금요기도회는 취소됐지만 시위를 결행키로 한 김의기는 12시경 회관에 들어가 희생을 최소로 줄이고자 모든 일을 혼자서 추진했고 6층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손수 타이핑해서 인쇄했다. 그 와중 계엄군이 진입해 체포하려고 했지만 김의기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엄군을 피해 유인물 인쇄를 계속했다.

 

하지만 계엄군을 막을 수는 없었고 결국 계엄군에 의해 인쇄는 중단된다. ‘동포에게 드리는 글의 내용과 유서가 없다는 점을 비춰 볼 때, 투신의 의도는 없었다고 판단되지만 계엄군과의 몸싸움이 있었고 결국 김의기는 6층 높이의 폭 1m 베란다 밖으로 떨어져 운명하였다.

 

계엄군들은 떨어진 그를 구하기는커녕 밑으로 떨어진 유인물을 줍느라 바빴다. 사태가 진정된 후 늦게나마 계엄군에 의해 시신이 인근에 있는 혜화동 서울대 병원으로 옮겨졌다. 결국 김의기는 22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자료: 김의기기념사업회)

 

아래 글은 박 철목사(김의기열사 누나 김주숙 남편)가 쓴 것으로 2023530일 김의기 열사가 떠난지 43년이 되는 오늘 열사의 뜻을 이어받고자 싣게 되었다. 반민중적이고 사대매국정권 윤석열을 끌어 내리는 그날까지 열사의 정신을 따르겠노라.

 

 

오늘은 김의기가 계엄군의 5.18광주 학살의 만행을 목격하고 그 진상을 촉구하며 1980530일 종로5가 기독교회관 6층에서 계엄군의 탱크 위에 투신한 날입니다. 그가 남긴 유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다시 찾아 읽습니다.

 

43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세상이 많이 변한줄 알았는데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서 윤석열 검사독재정권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그 수법은 더 악랄해지고 교묘해졌습니다. 민주가 어떻고 민족이 어떤지 안중에도 없는 무리들이 지금 이 땅에서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일본 자위대함 욱일기가 부산 해군작전기지에서 휘날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굴욕적인 아침을 맞습니다.

 

악이 선보다 강한 세상, 정의가 불의한테 눌리는 세상, 이런 세상이야말로 우리가 분노해야 하고 고쳐 나가야 할 세상입니다. 김의기가 죽어가면서 외쳤던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는 지금도 유효하고 현재진행형이란 사실입니다.

 

김의기 묘비에 적힌 글

1980530(76학번. 서강대 4년 재학중) 광주참상을 목격하고 기독교회관 6층에서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는가?"라는 광주학살 진상을 촉구하는 유서를 뿌리고 계엄군 장갑차 위에 투신 순국함.

 

김의기 유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

 

피를 부르는 미친 군홧발 소리가

우리가 고요히 잠들려는 우리의 안방에까지 스며들어

우리의 가슴팍과 머리를 짓이기어 놓으려 하고 있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공포가 우리를 짓눌러 우리의 숨통을 막아 버리고

우리의 눈과 귀를 막아

우리를 번득이는 총칼의 위협 아래 끌려 다니는 노예로 만들고 있는 지금,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참한 살육으로 수많은 선량한 민주시민들의 피를

뜨거운 오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봉기가

유신잔당들의 악랄한 언론탄압으로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20년 동안 살벌한 총검 아래 갖은 압제와 만행을 자행하던 박 유신정권은

그 수괴가 피를 뿌리고 쓰러졌으나

그 잔당들에 의해 더욱 가혹한 탄압과 압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20년 동안 허위적 통계 숫자와 사이비 경제이론으로

민중의 생활을 도탄에 몰아넣은 결과를 우리는 지금 일부 돈 가진 자와

권력 가진 자를 제외한 온 민중이 받는 생존권의 위협이라는 것으로

똑똑히 보고 있다. 유신잔당들은 이제 그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개처럼, 노예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높푸른 하늘 우러르며 자유시민으로서

맑은 공기 마음껏 마시며 환희와 승리의 노래를 부르면서 살 것인가?

또다시 치욕의 역사를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고 떳떳한 조상이 될 것인가? 동포여, 일어나자. 마지막 한 사람까지 일어나자.

우리의 힘 모은 싸움은 역사의 정방향에 서 있다.

우리는 이긴다. 반드시 이기고야 만다.

동포여, 일어나 유신잔당의 마지막 숨통에 결정적 철퇴를 가하자.

일어나자, 일어나자. 동포여! 내일 정오 서울역 광장에 모여 오늘의 성전에 몸바쳐 싸우자. 동포여!

-1980530, 오후435/ 김 의기-

 

김의기 열사의 유서      © 프레스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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