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연재】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4)
6. 빨찌산의 《녀장군》
(허성숙동무를 회상하여)
황 순 희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창건하신 항일유격대에는 용감하고 슬기롭게 싸운 녀대원들이 많았다.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우리들은 허성숙동무의 대담성과 용감성에 대하여 자기 일처럼 자랑하기를 즐겨했다.
어느 하루 숙영준비를 끝마친 우리들은 통쾌한 전투담에 한창 신바람이 났었다.
《글쎄, 전주대꼭대기에 어느새 올라갔다니까.》
허성숙동무와 함께 식량공작을 갔다온 김동무가 말머리를 떼자 떠들썩하던 이야기판이 잠시 조용해졌다.
《짐은 아마 우리 세배나 실히 지였을게요.》
그는 이렇게 성숙동무의 자랑을 늘어놓으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부락에서 식량공작을 해가지고 돌아오던 길에 그들은 수림속에서 잠시 휴식했었다. 그런데 보초를 섰던 동무가 《토벌대》놈들이 나타났다고 소리쳤다.
성숙동무가 그쪽을 살폈을 때에는 5~6명의 《토벌대》놈들이 가까이에 접근해오고있었다. 성숙동무는 대원들이 전부 수림속에 자취를 감추자 자기는 어느새 전주대꼭대기에 올라갔던것이다.
얼마후에 놈들은 전주대가까이로 접근해오고있었다.
성숙동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놈들에게 수류탄벼락을 들씌웠다.
놈들은 그만 찍소리도 못치고 그자리에서 삼꺼풀이 되고말았다.
《글쎄, 얼마나 빠르던지 다람쥐가 왔다가 울고가겠습디다.》
김동무는 이렇게 며칠전에 있은 이야기를 신이 나서 하였다.
이야기가 끝나자 다음에는 한팔로 보총꼬느기시합이 벌어졌었다.
38식보총끝을 한손으로 잡고 수평으로 올린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모두들 왁자지껄 고아대는 판에 저녁밥을 지으며 노래를 부르고있던 성숙동무가 한몫 끼우러왔었다.
《나에게는 저끝에 보총 한정을 더 끼워요.》이렇게 말하는 성숙동무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젠장 큰소리는, 만일 못들면 저녁밥은 없소.》하고 한 동무가 빈정대였다.
《올리면 어찌겠어요. 동무가 굶겠어요?》
성숙동무는 질세라 대꾸하며 쌩긋 웃어보인 다음 한손으로 련결시켜놓은 보총을 꼬나올렸다.
그가 총을 꼬나올리자 우리는 저마다 약속이나 한듯이 《야, 정말 저러기에 〈장군〉이라지.》라고 감탄하였다. 이와 같이 대담하고 기운센것으로 하여 그를 아는 대원들은 흔히 그를 《허장군》이라고 불렀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동단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조직에서 교양받으면서부터는 강도 일제에 대한 증오심과 계급적각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점차 자기가 나갈 앞길에 대한 눈이 트이자 그는 유격대에 입대할것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고있었다.
그러나 그때 그의 아버지는 일제놈들이 조직한 자위단의 단장을 하고있었다. 때문에 아버지와 그와의 사이에는 날카로운 사상투쟁이 벌어지군 했다.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 일제의 주구노릇을 그만둘데 대하여 여러차례 간청하다싶이 했다. 그러나 부친은 끝끝내 어린 딸의 간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루는 아버지에게 완강히 말했다.
《만일 아버지가 그 주구노릇을 그만두지 않는 날엔 내 총에 맞을줄 아세요.》
이와 같이 엄한 딸의 태도에도 부친이 움직이지 않자 그는 드디여 집을 나와 삼도만유격구로 들어갔다. 여기에서 계속 활동하다가 드디여 그의 소망대로 1933년에 유격대원으로 입대하게 되였던것이다. 비록 17살의 어린 몸이였으나 성숙동무는 이때 벌써 남달리 숙성했고 대담했다. 입대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전투마다에서의 그의 대담성과 용감성은 많은 전우들의 화제에 오르게 되였던것이다.
그는 날이 갈수록 유격대의 강철같은 대오속에서 성장했고 무수한 전투와 고난의 행군을 통하여 전우들의 두터운 사랑과 높은 존경을 받게 되였다.
그는 비록 녀성의 몸이지만 오히려 남대원들을 항상 도와줬다. 기관총수가 힘겨워할 때면 그 기관총을 교대해메여주었고 숙영할 때면 솔선 식사준비를 했다.
대원들이 몹시 피곤해할 때면 선두에서 오락회를 열었고 자기부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 그 피곤을 덜어주기에 힘썼다.
1939년 여름에 진행된 한총구전투때였다.
이때 그가 속한 소대에는 신대원들이 많았다. 돌격전이 벌어지자 전투경험이 없는 신대원들은 좀처럼 머리를 쳐들지 못하였다. 이때 성숙동무는 치마를 걷어올리고 구호를 웨치면서 맹호같이 앞장에서 내달았다.
이에 고무된 신대원들도 뛰쳐나와 돌격선으로 내달았던것이다.
이 전투에서도 일제놈들은 더러운 시체를 산더미로 남겨놓은채 참패를 당했다.
《훌륭한 지휘관이던데.》
《수염이 없어서 그렇지 꼭 〈장군〉이라니까.》
승리로 전투를 결속지은 전우들이 이런 말을 그의 옆에서 주고받을 때면 의례히 그는 《30살이 되면 굉장히 수염도 날테니 두고봐요, 에헴.》하고 수염을 쓰다듬는 흉내를 내여 웃기군 했다. 이렇게 그는 언제나 전우들의 유쾌한 화제거리의 대상이였다.
이 《허장군》을 두고 말할 때 나는 간삼봉전투를 이야기하지 않을수 없다.
1937년 6월 30일 아침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몸소 지휘하신 이 전투는 우리 전투원들에게 특별한 대담성과 영예감과 승리에 대한 신심을 주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지휘밑에 600여명의 조선인민혁명군은 서강고원 간삼봉에 전투진지를 잡았다. 전투마다 참패를 거듭한 일제놈들은 동북에 주둔하고있는 부대로써는 도저히 조선인민혁명군에 맞설수 없다는것을 자인하자 라남 제19사단소속 함흥 74련대의 2,000여명의 정규군을 동원하였다.
일제의 주구 김석원은 근 100대의 자동차에 병졸들을 태워가지고 압록강을 건너서 간삼봉을 향해왔다.
이날 새벽 보초소로부터 적정을 보고받으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곧 산아래 경사진 릉선에 각각 부대를 배치하시였다.
허성숙동무가 속한 련대는 제일 앞쪽에 진지를 차지하였다. 이날 아침은 구름이 낮게 드리우고 짙은 안개가 산을 뒤덮고있었다. 날이 훤히 밝기 시작할무렵 보초대가 있는쪽에서 요란한 기관총소리가 들려왔다.
안개를 리용하여 적들의 선발대는 우리의 코앞에 다가오고있었던것이다. 정세는 매우 위급하게 된 순간이였다.
그 순간 사격명령이 하달되였다.
우리는 적진을 향해 복수의 명중탄을 퍼부었다. 놈들은 혼비백산하여 뒤로 도망치고말았다.
이 화력전에서도 허성숙동무는 치마를 허리춤에 올려매고 맹렬한 사격전을 전개하였다. 참패를 당한 일제놈들은 어리석게도 3개방향으로 포위진을 치면서 다시 덤벼들었다.
우리들은 200~300m의 사격권안에 놈들을 몰아넣고 백발백중의 명중탄을 퍼부었다.
놈들은 또다시 무더기로 쓰러졌다. 쓰러지는 놈들을 눈아래로 바라보며 싸우는 우리 전투원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듯이 높았다.
그러나 적들도 만만치 않았다. 놈들은 무더기로 쓰러진 저희들의 시체를 밟으면서 검질기게 기여들었다.
제일 전연고지 앞코숭이에서 놈들을 침착하게 접근시키고있던 성숙동무는 놈들이 턱밑까지 기여오자 《바로 네놈들이 우리 조국산천을 강탈하고 부모형제를 못살게구는 원쑤들이다. 복수의 불벼락을 받아라.》하고 웨치면서 수류탄벼락을 들씌웠다. 이에 뒤이어 그의 옆에 매복하고있던 6명의 녀대원들도 놈들에게 수류탄벼락을 막 퍼부었다.
산지사방에서 놈들을 쓸어눕히는 수류탄, 적탄통, 기관총, 보총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놈들은 기여들다가도 썩어빠진 개바자 넘어지듯 쓰러졌다.
놈들은 공격마다에서 이렇게 참패를 당했다. 놈들은 하는수없이 동쪽 강기슭에 배치했던 병력까지 돌려세워가지고 최후발악의 공격을 가해왔다.
이렇게 가렬한 전투속에 저녁때가 되였다. 내려덮었던 구름장에서 비방울이 떨어지더니 비는 다시 억수로 퍼붓기 시작했다.
이윽고 놈들의 마지막돌격나팔소리가 온 골짜기에 떠들썩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에 우리 나팔수들은 일제히 《아리랑》을 유유히 불러댔다. 발악적인 놈들의 돌격나팔에 화답하듯이 울려퍼지는 우리의 《아리랑》나팔에 적들은 그만 아연실색했다.
허성숙동무는 이때 옆에 있는 녀대원들과 함께 나팔소리에 맞추어 《아리랑》을 소리높이 부르기 시작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
최후발악하는 원쑤들의 아우성에 대답하여 유유히 부르는 우리 녀대원들의 아리랑소리는 놈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성숙동무는 노래를 부르면서도 무섭게 번뜩이는 시선으로 원쑤를 노려보고있었다. 진종일 대오의 앞장에서 원쑤의 돌격을 물리친 그의 온몸은 탄연에 그슬려있었다.
증오와 복수로 하여 서리발어린 날창처럼 번뜩이는 그의 눈동자에서는 그대로 원쑤격멸의 무서운 불길이 확확 쏟아지고있었다.
놈들은 노래소리와 그 무서운 기세에 기압을 당하면서도 《독전대》의 총부리에 못이겨 히겁지겁 달려들었다.
허성숙동무는 또다시 이발로 수류탄안전못을 뽑으며 놈들을 코밑까지 접근시키고있었다. 턱밑까지 원쑤들이 기여들어도 바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이 전투를 지휘하시고계신다는것을 생각하니 그의 마음은 든든했었다. 그는 원쑤들이 접근해오자 사령관동지의 신호총소리에 이어 섬멸의 수류탄을 던지였다.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맨 선두에서 반돌격전에 나섰다. 그의 뒤를 이어 동이 터진 물살처럼 우리의 반격부대가 내달았다.
우리의 반돌격부대를 엄호하는 기관총들이 한결 더 세차게 불을 뿜었다.
우리들은 이렇게 놈들의 《삼면포위공격》을 완전히 좌절시켰다.
몇놈 남지 않은 원쑤들은 시체도 거둘새없이 뿔뿔이 꽁무니를 빼고말았다. 우리는 이 전투에서 1,500여명을 보기 좋게 섬멸했다. 이렇게 놈들은 우리 조선인민혁명군앞에 대참패를 당하고말았다.
이 승리는 오직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탁월한 지휘에 의해 이루어진것이다.
이렇게 성숙동무는 이 전투에서도 《허장군》이라는 별호 그대로의 영용성을 발휘하였다.
계속되는 무수한 전투들과 고난의 행군이 련속되는 나날들이 흘러갔다.
1939년 8월 조선인민혁명군은 《쏘련을 무장으로 옹호하자!》라는 구호밑에 일제에게 새로운 타격을 가하게 되였다. 이때 우리 부대는 할힌골을 침공한 일제에게 타격을 가하기 위하여 이 구호밑에 대사하ㅡ대장강전투를 진행하였다.
대사하ㅡ대장강은 안도와 명월구의 중간에 있는 성시이다. 당시 안도와 명월구는 할힌골을 침공한 적 후방력량의 집결처들이였다. 때문에 우리 인민혁명군부대들은 놈들의 량쪽력량을 대사하ㅡ대장강에 유인하여 섬멸시킬 계획이였다. 우리는 8월 23일 이른새벽부터 2일간에 걸쳐 이 전투를 진행하였다. 우리들은 이 전투에서 원쑤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23일 전투를 무사히 결속지은 우리의 일부 부대는 지휘부와 함께 동양툰으로 들어갔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저녁식사를 하고 다음날 전투를 준비할 계획이였다. 이때 허성숙동무는 한 늙은 대원과 함께 성문안에서 보초를 서고있었다. 그런데 어슬어슬해지자 갑자기 원쑤들의 자동차가 나타나게 되였다.
사태는 긴급했다. 재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지휘부가 위험한 처지에 빠질수 있었다.
성숙동무는 함께 보초를 서고있던 늙은 대원에게 명령하듯이 말했다.
《어서 지휘부에 뛰여가 알리세요.》
《동무가 가오. 내가 맞받아 불질하겠수다.》
늙은 대원은 죽음을 각오하는 이 임무를 자기가 맡겠다고 우겨댔다. 그러나 성숙동무는 양보하지 않고 욱다짐으로 그를 지휘부까지 뛰여보냈다. 그리고는 지휘부가 무사히 빠져나갈 때까지 단신 육박전을 할것을 각오했다.
원쑤들의 자동차가 가까와오자 성숙동무는 어느새 명중탄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에 당황망조한 놈들은 자동차에서 내리자 여기저기 매복하여 항거하기 시작했다.
허성숙동무가 원쑤의 불의의 습격을 맞받아 싸우는 사이에 지휘부성원들은 무사히 고지에 올랐다.
지휘부가 이미 안전한 산고지에 도착했을 무렵에 자기도 접전을 그만두고 산에 오르려했으나 이미 이때 그는 다리에 중상을 입었었다.
도저히 움직일수 없게 된 그는 놈들에게 생포되기보다 차라리 싸우다 죽으리라고 결심했다. 그는 자기가 가지고있는 250여발의 보총탄알이 진할 때까지 싸웠다.
총탄이 떨어지자 그는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으며 수류탄을 뽑아쥐고 성문옆에 엎드려있었다. 그의 대항사격이 멎자 놈들은 죽은줄만 알고 무리로 쓸어들었다.
자기 근처에 원쑤들이 밀려들자 성숙동무는 마지막의 수류탄을 터뜨렸다.
달려들던 원쑤들은 그만 무더기로 쓰러지고말았다.
그 무서운 폭음과 함께 성숙동무는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게 평시에 전우들에게서 《허장군》이라고 불리우며 사랑과 존경을 받던 허성숙동무는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우리는 그가 희생된 다음 그의 복수전을 계획했다. 밤새 대사하부락으로 밀려간 적들이 날이 밝으면 명월구쪽으로 내빼리라는것을 간파한 우리들은 큰길옆 굽인돌이에 매복하기로 했다.
훤히 먼동이 터오자 예견한대로 부릉거리는 자동차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매복조원들은 복수의 이를 갈며 자동차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드디여 원쑤들을 태운 자동차가 최속도로 달려왔다. 우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매복권안에 든 자동차들에 명중탄을 퍼부었다.
그리고 우리는 번개같이 달려나가 놈들을 모조리 잡아치웠다.
이렇게 우리는 성숙동무의 원쑤를 천만배로 갚아주었다.
그후에 안 일이지만 그 부락 인민들까지도 그의 영용성과 고귀한 정신에 탄복한 나머지 그 시체를 가만히 감추어묻었다가 1945년에 광복을 맞자 장례를 다시 크게 지냈다. 이 마을 인민들은 이름모르는 그의 무덤앞에 《영웅적으로 투쟁한 유격대 녀대원의 묘》라는 큰 묘비까지 세웠다.
이렇게 유격대의 《녀장군》허성숙동무는 둘도 없는 자기 생명의 마지막피한방울까지 다하여 25살의 보람찬 청춘을 조국에 바쳤다. 조선이 낳았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직접 육성한 유격대의 녀성영웅은 희생되였으나 조국에 바친 그의 불굴의 투지와 애국적혁명사상은 오늘 천리마로 달리는 우리의 현실속에 꽃피고 있다.
7. 리신금동지에 대한 회상
임 철
리신금동지는 1915년에 함북 어랑의 한 빈농가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유년시절에 부모를 따라 훈춘현 동강자로 이사해왔다.
입에 풀칠도 하기 어려운 가정형편에서 신금동지는 학교란 생각도 못했고 아직 잔뼈가 굳기전부터 부모를 도와 묵밭을 허비지 않으면 안되였다.
굶주림과 한숨속에서 암담한 소녀시절을 보내던 신금동지는 1930년대초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지도밑에 조직전개되기 시작한 혁명의 불길에 접하게 되였다.
당시 신금동지는 혁명투쟁에 나선 일가친척들의 영향을 받아 1931년 가을과 이듬해 봄의 추수, 춘황투쟁때에는 벌써 부녀회원으로서 솔선 군중의 선두에 서서 싸웠다.
그리고 유격대가 조직된 후에는 그의 원호사업에 발벗고 나섰으며 유격근거지가 왕청현 금창으로 옮기게 되자부터는 부녀회의 책임자로서 군중들을 지도하면서 더욱더 헌신적으로 일하게 되였다.
그는 1935년 요영구회의에서 제시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전략적방침에 근거하여 우리 유격대가 광활한 지대에로 진출하게 된 때에도 계속 부대를 떨어지지 않고 우리와 함께 간고한 투쟁의 길에 올랐다.
부대가 그 첫 행로를 로무허즈쪽으로 택하고 행군을 계속하던 어느날이였다.
식량공작을 나갔던 우리가 밤이 으슥해서 집결지점에 당도하니 우등불앞에 앉은 리신금동지는 남몰래 눈물을 훔치고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의 품에 있어야 할 어린애는 없고 그대신 총이 안겨있지 않는가.
의아한 생각이 든 나는 다른 녀성동무들에게 사실을 물었다. 나는 그들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내막을 알수 있었다.
이날 신금동지가 따라가던 4중대는 어느한 골짜기로 올라가다가 그만 내려오는 적들과 조우하게 되였다. 중대는 전투를 진행하면서 오른쪽 산릉선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이때 적들은 이미 높은 봉우리에 오른 때였다. 지형이 불리한데다 대비할수 없는 많은 적이라 중대는 적을 감당해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우선 무장이 없는 신입대원들이 안전지대로 후퇴하기까지는 그자리를 견지하여야 하였다. 이 신입대원들은 유격근거지 해산시에 받아들인 대원들이였다.
한쪽으로 빠지는 기미를 눈치챈 적들은 우회하여 후퇴하는 대렬을 추격하기 시작하였다.
눈판을 미끄럼타듯이 굴러내려온 신금동지는 개울을 건너 가파로운 산기슭에 달라붙었다. 눈이 무릎까지 빠지는 산비탈을 어린애를 업고 달리자니 여간 힘겹지 않았다. 그는 주먹을 부르쥐고 기를 쓰며 달렸지만 뒤에 떨어지고말았다.
적들은 그를 생포하려고 계속 추격해오고있었다.
그런데 신금동지는 어린애 요가 허리아래로 처져내려와서 뛸수 없게 되였다. 사태는 실로 위급해졌다. 그는 얼른 요의 띠를 풀어 어린애를 안았다. 돌아다보니 벌써 적 두놈이 30m 거리에 접근하고있었다. 어린애를 안고 뛰다가는 분명히 얼마 못가서 붙잡힐텐데 그렇게만 되는 날엔 두 목숨이 다 죽게 될것이 아닌가. 혁명을 위해서는 한사람이라도 살아서 싸워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어찌 차마 어린것을 버릴수 있으랴.
모진 마음을 먹으려던 그는 저도 모르게 어린애를 더 힘있게 가슴에 그러안은채 그냥 산판을 달려올라가고있었다. 비록 달리고는 있었지만 이러기도 힘들고 저러기도 어려운 갈림길에 나선 그의 가슴속에서는 모닥불이 타번지는듯하였다.
얼마 못가서 신금동지는 산중턱에서 엄호사격을 하는 대원을 만났다. 그는 후퇴하는 신입대원들을 호위해오는 대원이였다. 이때부터 신금동지는 그 대원의 엄호를 받으며 달렸다. 그러나 신금동지가 산마루 턱밑에 이르러 숨을 돌리며 돌아다보니 뒤로 퇴각해오던 그 대원은 그만 적탄에 맞아 이깔나무옆에 쓰러졌다. 귀중한 혁명동지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신금동지는 얼른 어린애를 내려놓고 도로 달려내려갔다.
그런데 불행히도 가슴에 흉탄을 맞은 그 대원은 벌써 숨을 거두고말았던것이다. 증오와 복수심에 불타오른 신금동지는 어린애를 품었던 가슴에 희생된 전우의 총을 힘껏 붙안았다. 그리고는 접근해오는 적에게 사격을 가하며 산판을 달려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이때 산등성이에서는 벌서 에돌아올라온 적들이 고함을 지르고있었다. 신금동지의 앞길이 막혀버렸다. 이제는 옆으로 빠져나갈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원쑤들이 차지하고있는 그 지점에는 두고내려온 어린애가 있지 않는가. 그는 자기도 모르게 어린애가 있는 산우로 몇걸음 더 톺아올라갔다. 그 순간 그의 머리속에는 번개같이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어린애가 더 귀한가? 혁명이 더 귀중한가? 그의 심장은 준엄한 고민속에 고동치였다.
어린애를 구원하려면 투항하든가 죽든가 하는 두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절대로 그럴수는 없었다. 혁명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삼키며 산판을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어린애를 잃은 신금동지는 어린애대신 희생된 전우의 총을 품고 우등불앞에서 눈물을 흘리고있었던것이다.
어린 딸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이 오죽했으랴. 가슴쓰리고 아픈 일이 많다 하여도 이보다 더한 일이 또 어디 있으랴.
우등불에 비치는 그의 얼굴에서는 다름아닌 피눈물이 흘러내리고있었으며 잡고있는 총은 비분과 증오로 하여 떨리고있었다.
그후 그는 이 원한과 복수가 어린 총을 들고 북만으로 들어가 목단강 북쪽 산림철도습격을 비롯한 여러차례에 걸친 전투들에서 보복의 명중탄으로 수많은 적들을 무찔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어느 한 전투에서 손목에 부상을 당하였다. 중대장은 그를 밀영에 남도록 일렀지만 그는 종시 듣지 않고 계속 전투부대를 따라다니며 작식대공작을 수행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고된 행군뒤에도 우등불곁에서 밤깊도록 대원들의 옷을 기웠고 하루이틀 휴식이 있을 때면 의례히 대원들의 빨래를 해주군 하였다.
리신금동지가 그 얼마나 자기 맡은 혁명임무에 헌신하였으며 충실하였는가 하는것은 1938년 여름 삼도령을 넘는 행군시에서도 여실히 표현되였다. 이 고난의 행군에서 작식대원으로서의 신금동지의 역할은 실로 컸던것이다.
당시 경박호수력발전소를 습격하고 뒤따르는 적들을 격멸하면서 액목현에 진출한 우리 부대는 앞길을 가로막고있는 적들의 력량을 분산시키기 위하여 3개 방향으로 갈라지게 되였다.
그때 신금동지는 나와 한부대에 배치되였다. 우리 부대는 적들이 행적을 찾을수 없게 삼도령 무인지경을 돌파하며 행군을 계속하였다. 비상용량식으로 가지고다니던 미시가루마저 떨어지고말았다. 아직 햇곡식이 나오지 않은데다 무인지경을 행군하다나니 도중에서 량식을 구할수도 없었던것이다. 모두 풀을 뜯어먹으며 강행군을 계속하였다. 무더운 여름날 물자루가 되여 행군하자니 헐하지 않았다. 나무그늘에 앉으면 손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지만 그래도 행군명령이 내리면 모두 입술을 깨물고 비칠거리며 일어서군 하였다.
이렇게 간고한 행군이 계속되던 어느날이였다.
1주일동안이나 굶은 대원들은 나무그늘에 누운채 정신을 못차렸다. 행군명령이 내렸지만 일어나는 사람은 불과 몇사람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는수없이 그 자리에서 좀더 휴식하게 되였다. 나도 혼미해지는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잠시 나무그늘에 누워있었다. 그런데 이때 신금동지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산판을 기여내려가는것이였다.
그후 신금동지로부터 들어서 안 일이지만 이때 신금동지도 그처럼 고난을 이겨내려고 애쓰던 전우들이 지칠대로 지쳐서 맥을 놓고 누워있는것을 보자 그는 작식대원으로서 마치도 그 모든 책임이 자기에게 있는것만 같은 그러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는 더 행군할것 같지 않았다. 무슨 좋은 수가 없을가? 하고 여러가지로 생각해보았으나 이렇다할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누워만 있을수는 없었다. 그는 힘을 가다듬고 무엇인가 찾아볼 생각으로 산비탈을 기여내려갔다. 산비탈을 거의 내려갔을 때 그는 어디선가 시내물흐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에게는 어렸을적에 가재를 잡아먹던 일이 얼핏 떠올랐다. 그는 저 시내에 가재라도 없을가? 하는 생각으로 그쪽으로 기여갔다.
개울바닥에 있는 돌밑에는 가재들이 우글거리고있었다. 순간 신금동지의 눈앞에는 기력을 회복하는 전우들의 모습이 얼른거렸다. 그러자 그에게는 어디선가 새로운 힘이 솟는것이였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하여 물우에 엎딘채 가재를 잡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물이 얕은 곳이여서 그는 한말가량의 가재를 잡을수가 있었다. 그는 웃옷을 벗어서 그속에 가재를 넣어가지고 돌아왔다.
그가 우글거리는 가재를 삶으려고 할 때 비로소 동무들은 모든 사실을 짐작하고 눈물이 글썽하여 신금동지를 쳐다보는것이였다.
나도 목이 메도록 가슴속에서 뜨거운것이 끓어올라 자리에 그대로 누워있을수가 없었다.
나와 동무들은 마침내는 자리를 차고 일어나서 격동된 마음으로 신금동지의 손을 힘있게 잡아흔들었다.
동지들을 위한 신금동지의 열렬한 헌신성에 감동된 우리는 당장 팔다리에 새힘이 솟구쳐오르는것을 느꼈다.
우리는 주위에서 나무를 거둬모은다, 불을 지핀다 하면서 신금동지의 일손을 거들어주기 시작하였다.
이렇듯 전우들이 기운을 내는것을 바라보자 신금동지는 그자리에서 다시 시내가로 내려가려고 했다. 그러자 다른 동무들도 하나둘 그의 뒤를 따랐다.
개울가로 내려간 우리들은 밀가루포대로 두포대나 가재를 잡아가지고 올라왔다. 가재를 삶아서 나누어먹은 우리들은 모두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고난의 행군을 계속할수 있었으며 신금동지는 행군총화에서 지휘관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행군을 마치고 횡도하자 남쪽에 있는 로송령밀림속에 다달은 우리 부대는 비로소 제대로 휴식을 하게 되였다.
그러나 이때 전혀 뜻하지 않던 일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어느날 아침 보초선에서 신호총소리가 울렸던것이다.
여기저기 초막을 치고있던 우리들은 얼른 배낭들을 메고 밖으로 나왔다. 나는 대원들을 데리고 동쪽으로 피하였다. 이때 신금동지는 최일정치지도원이 인솔한 7~8명의 대렬을 따라 곧장 산등성이로 올라갔다.
그런데 적들은 이미 그 산등성이에도 매복하고있었다. 그러나 이제 방향을 딴 곳으로 돌릴수는 없었다. 놈들은 벌써 사면으로 우리를 포위하고있었던것이다. 놈들은 올라오는 그들을 발견하자 곧 사격을 퍼부었다.
적탄은 비발치듯 그들의 앞뒤에 와 떨어졌다. 이리하여 적의 매복선을 돌파하는 육박전이 벌어졌다. 아군의 혈로를 여는 이 육박전에서 최일지도원과 기관총대 서병섭분대장동무가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그들은 자기 몸으로 아군의 위기를 구출하였던것이다.
그곳을 빠져나온 그 대렬은 적의 추격을 저지하면서 서쪽 산비탈에 붙었다. 그런데 적아간에 육박전이 벌어질 때 그만 신금동지는 그 대렬에서 뒤떨어지게 되였다.
적들은 그들에게로 달려들었다. 사태는 그야말로 위급했다.
이때였다.
신금동지는 다른 대원들에게 《내가 엄호할테니 동무들은 어서 저쪽 산비탈에 붙으세요.》하고 웨치면서 달려드는 적들을 맞받아나가며 사격하기 시작했다.
다른 대원들이 말렸으나 신금동지는 들은체도 않고 계속 사격하면서 내달릴뿐이였다.
그이상 지체할수 없게 된 다른 대원들은 하는수없이 숲속을 꿰뚫고 저쪽 산비탈에 붙었다. 그들은 그곳에 의지하고 신금동지가 빠져나올수 있도록 엄호사격을 하였다.
그러나 벌써 가까이 접근해온 적들은 사방에서 신금동지를 포위하고 조여들고있었다. 신금동지는 이때 이미 움직일수 없게 부상을 입었었다. 그는 계속 맹사격을 하면서 포위망을 조여드는 적을 향하여 마지막수류탄을 힘껏 던지였다. 원쑤들은 무더기로 쓰러지면서도 계속 기여들었다. 어찌할수 없게 된 신금동지는 총에서 격발기를 뽑아들자 《김일성장군 만세!》, 《조선혁명 만세!》하고 소리높이 웨치며 달려드는 원쑤의 면상을 맞받아 던지였다.
그와 동시에 원쑤들이 란사하는 총소리가 자지러지게 들리였다.
그 총소리에 뒤섞이여 그의 만세소리가 온 산중에 울렸다.
리신금동지는 이렇게 자기의 마지막 피한방울까지 조국과 혁명을 위하여 바쳤다.
신금동지의 이러한 열화같은 혁명적열정과 투쟁에서의 고귀한 희생성은 그후 무장투쟁과정에서 어느 때나 우리에게 크나큰 고무로 되였었다.
그때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나 날과 더불어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 무한히 충직한 혁명전사였던 신금동지의 모습은 더욱더 생생하게 우리에게 안겨오고있으며 그가 지녔던 숭고한 정신은 오늘 번영하는 조국의 품에서 헌신하고있는 우리의 가슴속에서 드높이 고동치고 있다. <저작권자 ⓒ 프레스아리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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