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빨치산이셨던 변숙현 선생이 운명하셨다
"참된 삶은 소유에 있는것이 아니라 존재를 향한 끊임없는 성찰에, 참된 세상을 위한 끝없는 실천에 있습니다. 죽으면 한줌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인데, 살아있을때 최후의 그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야죠"
“나는 내 생애에서 젤로 보람있게 산 것은 저기서 산거야, 산에서.”
1950년 전세의 불리함으로 입산하게 된 여성빨치산들은 산에서의 생활은 오히려 누구의 아내로, 누구의 딸로 규정지어져 있던 가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남성 동지들과 동등한 관계로 활동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한다.
1952년 전남 순창군 용골산에서 군경토벌대에 의해 생포되기 전까지 철저한 조직생활과 도당학교에 가서 ‘그렇게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면서 강인한 ‘혁명가’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녀성 빨치산 변숙현 선생은 말씀하였다.
최고령의 100세 녀성 빨치산 변숙현 선생께서 통일 조국을 못 보고 2023년 9월 20일 오전 10시에 100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순창군 동계면 여맹, 회문산으로 입산하여 “나는 내 생애에서 젤-로 보람있게 산 것은 저기서 산거야, 산에서. 보람있게 살았어요, 그때가 참- 보람있었어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산에서 우리는 차별이 없었어요. 그것이 좋았어요"라고 변숙현 선생은 말씀하였다.
<코리아 포커스>에 실린 17년전 인터뷰 내용을 변숙현 선생을 추모하는 뜻으로 《프레스아리랑》이 게재하기로 하였다.
생은 엄연하고 역사는 엄숙하다. ‘감히 글로 그 기구하고 장엄했던 삶의 역사를 생생히 복원할 수 있겠는가?’라는 회의 속에서도 한 생명의 삶을 최대한 인터뷰로 복원해 보았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존재의 각성과 결단은 어디까지인가. 혁명이란 무엇인가. 여기 이 할머니께서 우리에게 말해준다. “사람은 참된 삶을 위한 실천으로 산다. 존재의 각성과 결단은 끝이 없다. 또 조국과 민중을 위한 혁명은 평생을 바칠 만큼 고귀한 것이다”고. “단, 아쉬운 것은 바라던 세상이 아직 절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 사이에 어느덧 83세의 노인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라며 초연한 웃음이다. 그런 강철 같은 삶을 살아온 한 존재도 하나뿐인 아들 때문에 눈물 흘린다. 현재 아들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중병상태이다. 아들이 4살 때, 아들을 시부모에게 맡기고 빨치산으로 입산했던 그 할머니는 52년 토벌대에 붙잡혀 감옥에 10년 가까이 갇혀 있었다. 그리고 나와 보니 아들은 14살 소년이 돼 있었다. 먼저 빨치산으로 입산한 남편은 산에서 죽었다. 소설 태백산맥의 주인공 염상진 처럼 토벌대의 체포를 거부하고 자폭을 선택한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역사투쟁’이라고 불렀다. ‘현실에선 패배했지만, 언젠가 역사에서는 정의가, 민중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장엄한 믿음이 그들에겐 있었다. 그렇게 아비의 얼굴도 알지 못하고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아들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다. 14살 이후 함께 살았지만, ‘빨갱이의 자식’인 아들의 고통은 평생 계속됐다. 후회 없는 삶을 살아왔지만, 고통스러웠던 아들의 평생을 생각하면, “자식을 낳은 것만큼은 정말로 후회하고 있다”고, “그래서 그 자식에게 너무나 죄스러운 마음으로 지금도 살고 있다”고 할머니는 슬퍼한다. 이 할머니의 이름은 변숙현. 올해로 83세다. 일제식민지, 8·15해방, 한국전쟁과 분단, 군사독재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온몸으로 다 겪었다. 빨치산 시절의 동상이 감옥에서 악화돼 출소한 해인 60년에는 왼 팔꿈치 아래를 잘라내야 했던 큰 고통도 있었다. 그녀는 지금도 ‘전사(戰士)’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내 죽기 전에 제발이지 미군이 이 땅에서 완전히 철수하여 조국이 완전히 자주적으로 통일되고, 민중이 평등하게 주인 되어 계급차별 없는 그런 좋은 세상을 간절히 원한다”며 “그 간절함만큼 열심히 살아간다”고 밝혔다.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더 치열하게 살고 싶다고 덧붙인다. 4월6일(목) 오전, 지난 밤 늦게까지 평택 대추리에서 인터뷰 때문에 부랴부랴 올라오신 변숙현 선생을 서울 봉천동 ‘나눔의집’에서 만났다. 선생께서 요즘 가장 집중하는 일은 ‘대추리의 평화를 지키는 일’이다. ‘나눔의집’에는 현재 장기수 출신 김영식 선생과 문상봉 선생께서 함께 살고 있다. 또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사무실도 입주해 있다. 이곳은 그동안 많은 장기수들에게 따뜻한 쉼터 역할을 했다. 대추리의 미군기지 확장 저지 운동에 대해 말하는 변 선생의 눈이 반짝인다. 작은 몸에 깡마른, 모진 세월의 고통이 깊은 주름으로 자리 잡은 83세의 할머니이지만 정정한 기품과 반짝이는 눈망울에 청년·지식인·투사로서의 여러 모습이 동시에 체현돼 있다. 양반집에서 태어난 선생은 어렸을 때 “같은 사람이 상민이라고, 노비라고 차별받고 억압받는 것을 보며 세상의 모순에 처음 눈떴다”고 회고했다. 그때의 그 문제의식이 결국 ‘조국해방·민중해방을 위한 불꽃같은 평생을 사는 시작이 됐고, 남편이 그 불꽃에 결정적 불을 붙여주었다’고 말을 이었다. 여기 한 빨치산 출신 할머니 전사의 ‘기구한 삶, 그러나 장엄했던 투쟁의 역사’가 담긴 장문의 인터뷰 글을 그대로 싣는다. 차마 요약할 수 없는 인터뷰였다. - 대추리에 종종 가시나요? 성남 집에서 참 멀지 않나요? “힘들죠. 일단 용산역까지 가서 전철타고 갔다가 평택역에서 대추리로 가는 버스 타고 가지요. 그런데, 얼마 전부터는 다솜교회 한 목사님께서 교회로 오라고 해서 갔더니 식사를 대접하고 대추리까지 태워다 주세요. 그리고 끝나면 평택역까지 또 태워다 주고요. 우리가 매주 수요일 대추리를 가는데, 그때마다 그 목사님 참 고마운 분이시죠. 그렇게 서울에 와서 전철타고 성남으로 갑니다. 거기에서 아들, 며느리, 손자 2명과 함께 살고 있어요.” - 대추리가 위기인데요, 걱정이 많으시겠어요? “인터뷰만 아니면 곧 대추리가 위기라는 데 날을 새서라도 저항했을 거에요. 곧 쳐들어올 것 같아요. 거기서 꼭 승리해야 되는데... 주민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아요. 그게 걱정이에요. 전국에서 수만 명, 아니 수천 명이라도 모인다면 대추리, 도두리 평화의 들판을 지켜낼 수 있을 텐데... 참 아쉬워요. 지금 소원이라면 전국에서 수천 명이 모여 힘차게 투쟁해봤으면 하는 거에요. 대추리가 올해 투쟁의 핵심입니다.”(선생의 예감대로 4월7일 대추리는 세 번 째 공권력의 강제집행을 당했다.) - ‘대추리가 올해 투쟁의 핵심’이라는 말씀을 좀 더 자세히 해주세요. “대추리는 단순한 대추리가 아닙니다. 평택의 미군기지가 대폭 확장되는 것은 평택이 미국의 세계패권전략의 핵심기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죠. 세계패권전략이라 함은 결국 미국이 전 세계를 지배하고 침략하는 것을 말하므로, 곧 대추리가 미국의 전쟁기지가 되는 셈이죠. 그것을 반드시 저지시켜야 세계평화도 지켜지고, 한반도도 전쟁에 휘말리지 않게 되는 것이죠. 또 그렇게 해야 민족 간의 화해와 통일도 앞당겨집니다. 세계가 평택을 아주 주목하고 있어요. 어떤 운동보다도 가장 중요한 투쟁이 바로 대추리입니다. 그래서 매주 수요일 가는데, 어떤 날은 하루 더 있기도 합니다. 숙소가 좀 불편해도 어떻습니까. 그런 각오 정도는 했습니다.” - 대추리뿐만 아니라 여러 집회도 빠짐없이 다니신다고 들었습니다. “전 ‘통일광장’이라는 단체에 소속돼 있는데, 통일광장 선생님들과 함께 다니고 있습니다. 아주 급한 일이 없는 한 웬만한 집회는 다 나갑니다. 조국과 민중을 위한 집회가 얼마나 많습니까. 평택투쟁, 노동자 집회, 농민집회, 시민사회단체 기자회견... 그동안 해놓은 것도 없고, 다른 할 것이 또 뭐가 있겠습니까. 마지막까지 조국과 사회를 위해서 참여하고 투쟁하는 삶으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세월이 너무 흘러서 할머니가 된 것이 아쉬울 뿐이지요. 저 말고도 박정숙, 김성분 할머님이 계시는데 박정숙 할머님은 90세, 김성분 할머님은 82세의 연세인데도 정정하게 잘 다니십니다. 돌이켜보면 감옥에서 나온 후 서울거쳐 성남에 정착했던 지난 74년 이후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민주화투쟁, 통일운동, 반미운동, 민중생존권 보장 운동으로 한 30년 세월을 보냈네요...” - 매우 건강하고, 정정해보이십니다. “제가 83세입니다. 그런 소리를 많이 듣지요. 언제까지 이런 건강을 지킬 수 있을까 걱정이긴 하지만, 현재 지병이 없어서 다행이지요. 아직까지 성성하게 움직일 수 있어서 좋고요. 웃을지 모르겠지만, 제 삶은 정신적으로 20대입니다. 정신이 중요합니다. 어떤 참된 삶을 살 것인지 잘 고민하며 늘 청년처럼 사는 것이죠.”(웃음) - 참으로 기구한, 사연 많은 삶을 살아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음. 사연이 많다? 일단 제 삶을 한번 반추해보죠. 일제시대 1924년도에 전남 장성 북일면이라는 곳에서 났어요. 당시 기준으로 양반이지만 빈농의 장녀로 태어났지요. 아주 고생했다고 하는데, 저는 어릴 때 고생스러운 기억이 없어요. 다 좋았어요. 자랄 때 배우면서 마음속으로 여러 고민을 했던 기억이 많이 남아 있어요. 장성 변씨 집안은 양반가정으로 봉건사상이 농후한 집안이었어요. 여자라고 7,8살 때부터 바깥출입을 못하게 하고... 공부도 시키지 않는 그런 분위기에서 자랐지요. 그런데 그때부터 특수했어요. 우리집안에 노비가 남아 있었어요. 우리 집엔 없지만 집안의 다른 집에 가면 할머니, 할아버지 노비들이 있는 거에요. 심지어 꼬마들까지 하대를 하는. 그때 처음으로 이런 세상은 문제가 있다고 느꼈어요. ‘다 같은 사람인데, 왜 이러나?’ 그때부터 의심이 갔어요. 어른들한테 물어보면, ‘상놈이니까, 종이니까’ 하고 마는데, 제겐 굉장히 큰 수수께끼였어요.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해서 알면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가르치지를 않아요. 여자라고... 그러다 8살 때 1931년에 아버님이 돈 벌러 간다고 객지로 나가셨어요. 식구가 1녀1남인데, 그때부터 편모슬하였죠. 어머님보고 학교 공부하게 해달라는 말도 못했고, 다행히 국문은 가르쳤어요. 대부분 여성에겐 그것도 안 가르쳤는데, 편지 쓸 정도는 가르쳐주신 거죠. 학교나 서당도 못가고 편지 쓸 정도만 배웠어요. 그래서 책은 봤어요. 그때 고전을 많이 읽었어요. 중국역사책도 많이 읽고요. 그 책에서 충신들이 나라의 잘못을 지적하다가 귀양 가는 것을 많이 봤어요. 남편이 귀양 가면 남은 식구들이 관비가 돼, 어떤 경우는 탈출해서 복수하기도 하고... ‘왜 이런 일이 있을까?’ ‘아 이렇게 좋은 일하다가 노비가 되는구나’를 느꼈죠. ‘어렴풋이 이건 아니다...’ 그렇게 마음이 헤맨 거죠. 그때부터 세상의 모순에 눈뜨고, 배워야 한다는 일념이 생겼어요. 그러다 ‘중국 여장군전’이라는 고전을 접했어요. 어느 가정의 현모양처인데, 중국에 변란이 일어나니까 부부가 함께 출전했다는 이야기인데요, 언제나 부인이 대장을 맡고, 대문을 열고 나가면 그때부터 남편도 부인한테 복종했죠. 그러나 집에만 오면 남편 공경하는 이야기였어요. 그때 그래 배우면 여자도 다 이렇게 될 수 있다, 나도 배워서 뛰어난 여성이 되어야겠다는 맘을 먹기도 했죠.” - 해방 전에 만주로 가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 그러다 일제말기, 1943년 내가 20살 때. 아버님이 만주에서 소식을 보내 왔어요. 소식도 없던 아버님이 북만주에서 돈과 편지를 보내준 것이죠. ‘이 돈으로 조선서 살던지, 이 돈을 여비로 해서 중국에 오던지 해라’, 그렇게 해서 어머님과 우리 남매가 함께 북만주를 간 것이에요. 처음으로 바깥에 나가서 기차를 타고... 내 인생의 첫발, 새로운 인생으로 태어났지요. 가슴에 어수선함을 딛고 가서 아버님을 만나고. 거기엔 당시 조선 사람도 많이 있고, 찾아오는 사람도 많았고. 함경도 출신의 하숙집 딸이 나한테 이야기를 참 많이 해줬어요. 김일성 주석의 항일무장투쟁 부대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고. 그게 조선의 청년들이 북만주로 가서 벌목장에서 일하다가 여름에는 하숙집에 있으면서 오고가는 얘기를 자연스럽게 들은 것이죠. 조선에서는 전혀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 항일무장투쟁 이런 이야기가 가슴을 설레게 했어요. 아버님께도 물어보면, 자세히 말씀해주셨어요. ‘나도 조선에 있을 때 비적이나 마적이 있다는 이야기 들었다. 근데 여기 와서 보니 마적은 도적이고, 비적들은 독립군들이다. 독립군을 나쁘게 부르는 것이다.’ 또 그들이 어떻게 투쟁한다는 것과 청년들이 그리 많이 가서 배운다는 것, 청년들을 독립군으로 양성시키고 있다는 얘기, 그들은 참 평등하다는 이야기도 해주셨죠. 아버님께서도 남만주에 있으면서 개화하셔서 신문명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그 말을 들으니까, ‘내가 꿈꾸던 곳이 바로 여기야. 항일무장투쟁 부대로 가야지’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곳으로 찾아가야지 했는데, 일본말, 중국말 못하니까 못 찾아가고 있었죠. 또 재작년 41년까지는 자주 왔는데, 42년부터는 잘 안 보이더라는 말도 있었고요. 산에서 내려와서 부잣집, 일본놈집 털어서 가난한 사람들한테 나눠주고 갔는데... 요즘 안 보인다고 하숙집 딸도 얘길 하더라고요. 그렇게 찾아가지는 못하고 기다렸는데 결국 만나지 못했지요.” - 만주에서 결혼도 하고, 해방도 맞이하셨다고요? “당시에 20살은 노처녀였어요. 도착하니까 혼담이 오간 총각이 있었어요. 45년 22살이 되던 해. 남자들은 다 징병으로 끌려가던 그 때. 결혼안하고 독립군부대로 가려했으나 못가고, 45년 여름에 저랑 혼담이 오간 그 총각과 결혼을 하게 됐지요. 2년을 기다려준 것이 고맙기도 하고. 남편 고향이 전북 순창인데 전라도 사람이라서 반가운 것도 있고, 아버님이 독자였고 자식이 남매뿐이니 남편이 5남 1녀로 형제?많고 해서... 근데, 얼굴도 못보고 결혼했어요.(웃음) 그리고 3달도 안 되서 해방이 됐어요. 당시 만주에서도 청년단이 금방 조직되고. 한복입고, 태극기 들고, 독립군가도 울려 퍼지고... 아직도 생생이 기억이 나요.” - 내려오자마자 남편과 ‘생이별’ 같은 것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추석 쇠고 그 다음날 출발했어요. 조국해방되었다고 기쁘게 귀국한 거죠. 전북 순창에 갔더니 11월이 되었데요. 시부모님 댁으로 갔어요. 남쪽은 미군이 들어와서 어수선한 상황이었어요. 이미 미군이 사람을 죽이는 일도 발생한 상황이었지요. 남편은 순창에서 16살 때 객지로 나가서 24살 먹어서 결혼해서 돌아온 것이에요. 돌아오자마자 남편은 친구들과 얘기를 하러 나가더라고요. 그리곤 몇 일 있다가 오셨어요. 아는 사람이라고는 남편과 만주 결혼식 때 오신 큰 아주버님밖에 없는데... 남편은 당시 바로 인민위원회 계열 청년단체 활동에 열중한 것이었어요.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남편은 46년까지는 옷을 갈아 입으로 그래도 종종 오더니, 47년부터는 아주 어쩌다 오고, 어느 때부터 소식이 없어요. 딴 친구들이 소식을 전하러 오고, 물어보면 잘 있다고 해요. 근데, 46년도 그때부터 경찰이 드나들기 시작했어요. 벽보 붙어 있으면 와서 물어보고. 점점 남한 경찰의 탄압이 심해지고 있었죠. 전 그때 집에 있었지만, 경찰하고 잘 싸웠어요. 봉건사상에 억눌려 컸다 해다 사회모순을 깨달으면서 내재된 의식이 있어서 경찰하고 맞서고 잘 했지요. 그러면 남편 친구들이 와서 잘 싸웠다고 해요. 알고 봤더니 남편은 46년부터 이미 입산해서 남로당 전북도당 활동을 하고 있었어요. 빨치산이 된 거죠. 이른바 ‘산사람’. 남편 고향인 순창이 갑오농민전쟁의 중심지였죠. 그런 의식에다가 만주에서도 배운 것이 있고. 당시에 청년들은 또 대부분 좌익이었으니 자연스럽게 빨치산까지 된 것이죠.” - 선생님도 남로당에 입당하셨나요? “그렇게 남편 소식은 없고, 연락만 가끔 받고. 전 민가에서 봉화도 하고, 벽보도 붙이면서 서서히 활동을 시작했어요. 그리고 47년도에 남로당에 입당했지요. 당시에 갓난아기가 있어서 입산은 못했어요. 47년 2월에 지금 같이 살고 있는 아들이 태어났거든요. 전 지우자고 했는데, 남편이 얼마든지 낳고도 활동할 수 있다며 낳자고 했어요. 그래서 갓난아기와 함께 민가에서 조직원으로 활동했지요. 지령을 전달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임무였어요. 경찰의 눈을 피해 아기 기저귀 안에 지령을 숨겨 전달하곤 했죠. 48년부터 탄압이 더 심해지고. 가산도 소진되어 가고. 남편은 48년 남북통합을 위한 연석회의를 위해 북쪽으로 갔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그러던 중 49년에 산에서 연락이 왔어요. 체포령이 내렸다면서 바로 피신해라고. 그래서 49년도에 아기업고 피신했지요. 마침 하나뿐인 남동생이 남쪽 군대에 있었어요. 동생 덕택에 무사히 피해 다닐 수 있었지요.” - 그러다 한국전쟁이 발생했군요... “예. 그 때 한국전쟁이 났고, 그렇게 해방이 되어 인민군들 내려올 때 남편도 같이 오셨어요. 남북통합연석회의에 가서 이북에서 못 돌아오다가 전쟁 때 같이 오신 거죠. 그때 태백산 빨치산으로 있다가 김제, 순창까지 왔데요. 그런데도 만나지를 못했어요. 인민군이 밀리면서 못 만나게 된 것이죠. 남편은 후퇴하지 않고 전북 회문산 일대 빨치산으로 남았어요. 이제 저도 입산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죠. 50년 가을 후퇴한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구빨치들(한국전쟁 전부터 입산해있던 이들)을 잘 알고 지내서 선이 닿았고 그렇게 입산했지요. 그때 남편을 4년 만에 잠깐 만날 수 있었어요. 남편이 장수군당 책임자로 있었거든요.” - 그 후로 남편과는 어떻게 종종 만나셨나요? “안타깝게도 남편이 원래 김제군당 소속이었는데 장수군당 책임자로 갈 때 4년 만에 잠깐 본 게 전부지요. 입산해서 자고 있는데, 누가 와서 막 깨워요. 그때 시동생 한 분도 함께 입산해 있었는데, 둘이 어서 오라는 거에요. 그렇게 갔더니 남편이 와 있더라고요. 그렇게 4년 만에 처음이자, 인생에서 마지막이 되 버린 아침 한 끼를 셋이서 같이 먹었어요. 그 후에는 오다가다 잠깐 봤지만, 남들이 부부간이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자기 일만 서로 열심히 했지요. 악수도 오히려 잘 안하고. 51년 봄 토벌대의 공세가 심해서 지리산까지 간 적이 있었어요. 제가 있던 순창군 동계면이 깨지면서 은신처로 들어갈 때였는데, 선이 자꾸 끊어지고 그러던 중, 그때 지리산으로 가는 남원군당 사람들 일행을 만나서 지리산으로 함께 간 것이지요. 근데, 어떻게 남편이 내가 지리산에 있는지 알고 어서 본지로 돌아가라고 연락을 보내왔어요. ‘피난민처럼 피해 다니냐’고 꾸짖으면서요, 아주 냉정했어요. 난 당시에 지리산 달궁에 있었는데, 남편은 뱀사골에 왔다고 하더라고요. 만나려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는데, 일부러 안 만났어요. 사적으로 만날 일 없다, 나중에 당당히 만나자는 마음이었지요. 그 후로 전 다시 전북도당으로 돌아왔고 남편과의 소식도 완전히 끊어졌어요. 남편은 이북으로도 안 갔고. 잡히지도 않았고. 아무의 눈에도 안 띄었어요. 다만, 어느 비트엔가 중요간부 넷이 은거하고 있었는데, 변절자가 있어가지고 토벌대에게 은신처를 습격당해서 거기서 전원이 자폭했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남편도 거기서 죽은 거지요. 남편은 아마 토벌대에게 잡히는 치욕을 감당할 수 없었을 거에요. 남편은 그렇게 굉장히 냉정하고 원칙적인 사람이었어요. 사람들도 다 그렇게 얘기하고요. 그렇지 않고야 아무도 본 사람이 없을 수가 없거든요. 남편 얼굴이 꽤 알려진 사람이었는데. 결국 언제 어디서 죽은 줄은 몰라요. 유골도 무덤도 없지요...” - 그럼, 그때 아기와 함께 입산해 계셨나요? “아기와 함께 입산한 경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경우는 빨치산 구역에 있는 민가로 입산한 것이고요, 전투원이나 저 같은 정치요원으로 입산한 경우는 불가능하지요. 아기는 시부모님한테 맡겨놓고 왔어요. 그때가 4살 때였어요. 아이가 혼자 밥 떠먹는 것을 보고, 이젠 떼어놓고 가도 되겠다 싶었죠. 시부모님도 계셨고... 어서 빨리 조국해방이 이루어져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입산하게 됐어요.” - 그래도 네 살배기 아이를 떼어놓고 입산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맞아요. 제가 산에 있을 때, ‘시어머님께서 네가 와서 애를 키우면 안 되겠느냐?’하는 소식을 전해왔어요. ‘해질 무렵 문 앞에 앉아서 아기가 울고 있을 때... 사람들이 아기 엄마 어딨냐’고 한다고, ‘와서 키우라고 그런다’는 말씀과 함께 간절한 호소를 하셨지요. 그때 그러면 ‘저는 돌아와도 아기도 못 키우고 죽고 말아요’라고 말씀드렸어요. 저는 양반 집안에서만 살아서 대접만 받고 살았어요. 만주에서 보니까, 세상이 그렇지 않았어요. 제가 자랄 때는 상민을, 노비들을 ‘민촌것’들이라고 비하하고, 항아리 만드는 사람들을 제일 천대시하고. 갑오농민전쟁 때 실패를 한 사람들의 후손들이 살아남아서 모두 천대를 받았어요. 나라에서 다 잡아 죽이니까, 인간대접도 못 받는 독(항아리) 만드는 곳으로 들어갔지요. 나이든 노비들이 저보고 작은 아씨, 작은 아씨 하는데, 의아했어요. 종들도 인간인데... 그래서 나중에 남편보고 물었어요. ‘종은 무엇이고, 독 만드는 사람은 뚸 뭐냐?’ 알고 봤더니 시가 할아버지가 독 만드는 곳에서 살아남아서 남편까지 온 거에요. 시가는 천도교를 믿고 있었죠. 그런저런 자각으로 인간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그 모든 것들을 타파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이 아가 하나만 키우고 있어서는 세상에 엄청난 차별과 모순, 억압을 타파하기 어렵겠구나. 너무나 가슴 아프지만 아이 떼어놓고 운동을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요. 그래야 부모는 죽더라도 너는 좋은 세상에서 산다... 그렇지 못하면 이런 억압과 차별은 영원히 대물림된다... 그래서 뛰어든 거에요. 그러기 위해서 아이한테 정을 안줘야 한다... 그래야 떠날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떠나려고, 뛰어들려고, 아이한테 정을 안줬어요. 그래도 젖먹이 살게는 해줘야 하니 4살 때까지는 버텼어요. 모진 세월이었어요. 그때 어머님께서 내게 한 말씀을 아들이 커서도 못해줬어요. 생각해보면, 정말 냉정한 엄마였네요. 당시 시대상에서 그러나 절박한 심경이었어요. 참된 삶의 자각이 하루라도 빨리 조국해방, 인민해방 투쟁에 뛰어들고 싶게끔 만든 것이죠. 사람의 결단과 각성은 끝이 없고, 혁명이라는 것은 목숨을 걸 만한 고귀한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내가 죽더라도 너는 좋은 세상에서 살아라’라는 심정으로 아이를 떼어 놓았어요... 참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때는 그게 옳다고 생각했어요... 입산했을 때 시누이가 아들이 없었는데, 부모가 둘 다 죽어서 못 오게 되면 형님가로 입적해달라는 부탁까지 했었지요...” - 그 이후는 어떻게 되셨나요? “50년도에 입산해서 활동하다가 52년도에 토벌대에 의해 생포됐어요. 남원 수용소로 갔다가 광주 포로수용소로 갔지요. 거기서 6개월 살았죠. 빨치산은 전쟁포로가 아니라고 하면서 군법재판을 받아서 대전교도소로 갔어요. 갔더니 박선애-박순애 자매가 잡혀있데요.(‘전설적인 3남매 빨치산’ 기사 참조) 두 사람은 1월에 잡혀있었고, 전 2월에 잡혀왔어요. 재판은 박순애 선생하고 같이 받았죠. 재판받을 때 방청객은 없고, 사형구형을 받았어요. 옆에 M-1총으로 무장한 무장대가 있었어요. 바로 사형시키겠다는 태도로. 그러나 선고는 20년형을 받았어요. 그렇게 해서 대전교도소로 갔다가 다시 청주교도소 갔지요. 그렇게 청주교도소에서 옥살이를 10년 가까이 하고 있는데, 그때 우리 동생이 군대에 있었는데, 동생 친구가 누나는 뭐하냐고 어느 날 묻더래요. 그래서 군법재판 받고 수감 중이라고 했더니, 진작 말을 하지 그랬냐며 서류는 어떻게든 할 테니 국회의원 탄원 도장만 하나 받아 와라고 해서 일이 어떻게 잘 됐나 봐요. 청주교도소에서 9년째 옥살이하고 있는데, 60년도에 출소하게 됐어요.” - 나와 보니 아이는 어떻게 돼 있던가요? “60년도에 나와 보니까. 벌써 14살이 돼 있었어요. 시부모님과 넷째 시동생이 곡성에 살았는데, 거기서 키우고 있더라고요. 시부모님이 9살 때까지 키우시다가 시아버님들이 돌아가신 후 넷째 시동생이 키웠다고 하데요. 남편이 셋째였지요. 같이 입산한 시동생은 다섯째였고요.” - 그때부터는 아들과 함께 지내셨겠네요. “그랬죠. 그때 친부모님은 장성에서 부안으로 이사 가셔서 농사를 짓고 계셨어요. 그래서 아들이랑 함께 부안으로 가서 부모님하고 지냈는데, 경찰이 계속 괴롭히고, 동네에서도 빨갱이라고 하니 살기도 어렵고 해서, 당시에는 지역을 옮기면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는데, 잡을 테면 잡아봐라 하고는 아들과 함께 그냥 서울로 올라와버렸어요. 그때가 73년이에요. 당시에 친정에 돈이 좀 있어서 서울에 대충 정착을 했어요. 거기에도 경찰들이 와서 괴롭히더군요. 그렇게 경찰들이 괴롭히니 집주인이 세도 안주고... 그래서 74년도에 지금 살고 있는 성남으로 갔어요. 마침 군에 있는 동생이 성남에 땅 사놓은 것이 있어서 가게 됐죠. ‘여기를 제2의 고향을 삼자, 개척하는 마음으로 살자’고... 그때 동생이 20평 땅을 빌려줬는데, 그 위에 무허가로 집을 지어서 살게 됐고, 지금도 거기서 살고 있어요. 그렇게 나이 50이 넘어서 성남에 정착했어요. 아들도 어느덧 28살이 되었고요. 아들은 부모가 없어서 제대로 학교도 못 다니고, 빨갱이 자식이라고 취직도 안 되고... 많은 고통을 겪었지요. 다행히 나중에 어떻게 직장에도 다니고, 결혼해서 아들 둘을 낳아 지금 손자 2명도 같이 살고 있어요. 손자들도 다 장성했지요.” - 아드님이 아버지 얼굴도 모르겠네요, 고통도 정말 컸을 것 같고요... “그렇게 남편과 사이에 아들 하나가 있는데, 아들을 평생 동안 너무 고생만 시켰어요. 그게 너무나 죄스럽고 미안해요. 정말로 낳지 않았어야 했는데... 전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들이 현재 나이 60인데, 아버지 얼굴도 몰라요. 사진도 한 장 없어요. 만주에서 오자마자 지하좌익 활동하면서 사진하나 못 찍었어요. 그나마 결혼사진이 하나 있었는데, 남편이 입산한 후에 탄압을 피해서 사진도 없앴어요. 그래서 사진도 하나 없는 것이죠. 아들은 그렇게 14살이 되도록 어미와도 떨어져 지냈지요.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빨갱이 자식이라는 놀림이나 공격도 엄청 받았고요. 지금 아들이 많이 아파요. 이제 60인데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불치병에 걸렸어요... 그전에 건강할 때는 괜찮았는데, 불치병에 걸려 고통스러운 삶을 사니까, 부모 원망을 하네요... 아들한테는 정말 면목이 없지요. 아들은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고, 막노동을 하더라도 감시를 받았어요. 너무 미안해요. 평생 고생하다가 중병을 앓고 있는데, 그렇게 미안할 수가 없어요. 좋은 세상에서 좋은 부모 만나서 이 세상에 태어났어야 하는데... 우리가 없을 때 빨갱이소리 듣고 부모 없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돌이켜 보면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는데, 아들 일만 생각하면 낳은 것 자체를 후회할 정도에요... 감옥에 나와서 뒤늦게 아이를 가진 분들과는 엄청 달라요. 그 분들은 그래도 아이를 직접 키웠잖아요. 근데, 저희처럼 아이들이 어렸을 때 십수년을 떨어져 있게 되면 아이들이 사랑을 받지 못해서... 서로 고통스럽게 되는 거죠...” - 손자들은 할아버지에 대해서 궁금해 하지 않나요? “당연히 손자들이 묻지요. 왜 할아버지는 묘도 없고, 사진도 없냐고... 지금은 알아요. 자연스럽게 알게 됐어요. 손자들은 특별하게 운동 같은 것은 안 해요. 같이 사는 며느리가 ‘어머니, 운동현장에 다니는 것은 좋은데, 애들한테 영향만 끼치지 마세요’라고 부탁하데요. 그래서 저도 손자들한테 적극적으로 얘기를 못하는 면이 있어요. 그래도 가끔 이야기를 하는데, ‘왜 저런 운동이 있는지,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지’ 정도는 아는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아들과 며느리도 제가 운동하는 것을 말리지는 않아요. 뜻이 똑같지는 않겠지만...” - 남편이 많이 그리우시겠어요... “근데, 얼굴이 가물가물해요. 기억이 잘 안나요. 중매 결혼해, 봉건사상의 영향으로 남편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어요. 둘이 앉아서 오순도순 이야기해본 적도 없고. 남편도 말수가 적은데, 또 수줍은 색시를 만나서... 따지고 보면 같이 석 달도 못 있었어요. 남편 이름이 박태원인데, 남편하면 무감각해요. 근데, ‘박 동지’라고 하면 생각이 번쩍 나요. 당시에 인민을 위해,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했던 그이가 생각나서 가슴이 찡해져요. 나를 2년을 기다려서 결혼한 남편. 남편 유골이라도 발굴했으면 하는데... 장소를 모르니까 못 찾고 있지요. 혼자 스스로 그래요. ‘변숙현, 넌 네 남편도 못 찾고 있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운동에 뛰어든 것도 남편의 영향을 크게 받았어요. 일제로부터 해방했듯이 미제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인민은 모든 억압과 차별의 굴레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때 그 불을 남편이 확실히 붙여줬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남편은, 아니 박 동지는 조국해방·인민해방 투쟁의 선배이자 존경하는 동지였어요.” - 남편 제사는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죽은 날을 모르니 생일날에 제사를 지내고 있지요. 남편이 죽은 곳도 모르고, 유골도 없고... 지금도 지리산에 가끔 가지만 어디서 죽었는지 전혀 알 수 없어요. 넓고 넓은 지리산 어디에서... 비트라는 것이 말 그대로 비밀스러운 곳이니까 빨치산들도 알지 못해요.” - 이야기를 듣다보니 남동생이 여러 도움을 주셨네요. “남동생... 맞아요. 동생이 인생의 고비마다 많이 도왔죠. 그렇게 날 평생도운 남동생도 가?저리게 아파가지고 있어요. 몇 해 전에 쓰러져서 일산에 사는데 ‘너는 나를 살려줬는데, 나는 너를 살려줄 길이 없구나’하고 서러워하지요. 아픈지 3년 됐는데, 그전엔 ‘사흘이 멀다’하고 안부전화를 했어요.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찾아오고... 우리 남동생은 군인이었지만, 생각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날 많이 도와줬지요. 하나밖에 없는 형제이기도 하고. 내가 2005년도 가을에 평양엘 다녀왔는데 남동생한테 얘기했더니 듣고 좋아하데요. ‘몸이 이래서 여비도 못 드려서 죄송하다’고 하면서...” - 선생님 왼쪽 손은 의수을 하고 계신데요, 어떻게 된 일인지요? “산에 빨치산으로 있을 때 동상이 있었는데, 대전교도소에서부터 악화가 됐어요. 진물이 나고 쑥쑥 에리고... 정말 고통스러웠지요. 그런데 감옥에서 제대로 치료도 못 받고 그렇게 계속 동상이 있었어요. 60년 출소해서 나왔는데 좀 따뜻한 데 가니까 더 덧이 난 것에요. 그래서 부안에 있는 시골병원으로 갔는데, 절단해야 된 데요. 지금 생각해보면 큰 병원에 가면 자르지 않아도 됐는데... 결국 팔꿈치 아래를 잘라냈어요. 사람들이 물어보면 기계에 다쳤다고 했지요. 당시에 손이 너무 아팠어요. 손을 막 처음 자르고는 앞으로 살 일이 갑갑해서 자살도 고민하고 하다가 내가 여기에만 정신을 쓰면 안 되겠다하고 그렇게 정신을 차리니까 편해지데요. 출소한 그해 60년이었어요. 부모님께는 다시 한 번 불효를 저질렀지요. 그 때 팔꿈치 아래를 자르는데,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어요. 의사가 놀라더군요. 그렇게 제가 냉정한 면이 있었어요. 그래도 팔꿈치 아래를 자르고 나니 별 생각이 다 들기는 했지요...” - 그렇게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도 평생 신념을 지키고 사는 것이 어렵지 않으셨어요?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웃음) 남들이 ‘쉽게 살라고, 재혼도 해 봐라’는 이야기도 했지요. 그런데 저는 그게 너무 불쾌했어요. 봉건적인 것 때문도 있고, 박 동지하고 소중했던 기억이 있기도 하고... 봉건사상이란 것이 매우 나쁜 것이지만, 한편으론 제가 그때 배운 충이나 효 같은 도리들이 사람이 지조를 지키고, 신념을 지키고 사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그런 마음들이 조국, 인민, 동지에 대한 의리를 지켜나가는 힘이 된 것이죠. 그래서 그리 어렵지 않게 첫 마음을 지켜온 것 같아요. 재혼을 하면 남편을 배신하는 것 같아서 그런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어요. 조국이든, 남편이든 배신하지 않으려 노력한 것이죠.” - 청년들께 하고 싶은 말이 많으실 것 같아요. “그럼요. 우리 청년들이 앞으로 빨리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일 해줬으면 해요. 가능하다면 다 같이 한 몸으로 일어나서 남북화해와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 조국통일을 위해서 함께 했으면 해요. 이제 외국 군대는 이 땅에서 완전히 몰아낼 때가 되지 않았나요? ‘주권국가에 외국 군대라’ 이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인가요? 분단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산가족들이 하루에도 수십 명씩 절절히 그리운 가족도 못 보고 죽고 있어요... 남북 간의 대결은 또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요. 또 차별과 억압은 얼마나 서러운 것인가요? 사람으로 태어나서 일생을 행복하게 살아도 모자란데, 인민들에겐 갖은 차별과 억압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어요... 전 죽을 때까지 그런 활동을 할 것이고, 그것이 제 생의 가장 큰 긍지이자 보람이에요. 그렇게 역사의 진보와 전진을 믿어요. 우리 청년들과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고 싶고, 또 함께 활동하고 싶어요.” - 여생을 어떻게 보내실 생각이신지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처럼, 그렇게 살다 가야죠. 제 죽기 전에 최고의 희망이 있다면 미군을 이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것을 보는 거에요. 그래서 지금도 맨 날 대추리에 가는 거죠. 제발 그 바탕위에서 자주적으로 통일하고, 인민들이 주인 되는 사회였으면 해요. 더 적극적으로 하고 싶어요. 앞장서서. 인생의 막바지에서 더 열심히 하고 싶어요. 성남에 아들, 손자랑 같이 사는데 내가 어떻게 되면 또 그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그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주민등록을 옮겨놓고서라도 제대로 투쟁해보고 싶어요. 나이가 엄청 들어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더 치열하게 활동하고 싶은 마음인 것이지요. ‘참된 삶은 소유에 있는 것이라 아니라 존재를 향한 끊임없는 성찰에, 참된 세상을 위한 끝없는 실천에 있습니다.’ 죽으면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인데, 살아 있을 때 최후의 그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야죠...”
고 변숙현 선생 약력
변숙현 선생
빨치산 여전사 변숙현 동지의 편안한 영면을 빕니다. 이 글은 변숙현 선생이 83세에《코리아포커스》와 인터뷰한 내용으로 《코리아포커스》에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저작권자 ⓒ 프레스아리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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