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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일제국주의의 조선침략사(7)

일제의 정치적폭압통치

프레스아리랑 | 기사입력 2023/08/08 [19:51]

미일제국주의의 조선침략사(7)

일제의 정치적폭압통치

프레스아리랑 | 입력 : 2023/08/08 [19:51]

미일제국주의의 조선침략사(7)

 

머리글

1장 미일제국주의의 조선침략개시와 일제의 조선강점(1866~1905. 11)

 

1절 미일제국주의의 조선침략개시와 반식민지적예속화책동

1. 미일제국주의의 조선침략개시(1)

2. 미일제국주의의 범죄적공모결탁과 첫 예속적불평등조약의 강요(2)

3. 조약강요후 미일제국주의의 반식민지적예속화책동(3)

 

2절 일제의 조선강점과 그를 지원한 미제의 죄행

1. 일제의 대규모적무력침공과 조선에 대한 독점적지배실현책동(4)

2. 일제의 로일전쟁도발과 을사5조약의 날조를 통한 조선강점(5)

3. 일제의 조선강점을 적극 지원한 미제의 죄행(6)

 

2장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통치와 미제의 침략책동(1905. 11~1945. 8)

 

1절 조선에 대한 일제의 간악한 식민지통치

1. 일제의 정치적폭압통치(7)

 

 

1. 일제의 정치적폭압통치

 

 

"과거 조선을 강점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우리 나라에 총독부를 설치하고 군대, 헌병, 경찰, 감옥과 같은 폭압기구들을 대대적으로 증강하여 우리 인민들을 가혹하게 탄압하였으며 조선을 자기들의 식량과 원료 공급지로, 대륙침략을 위한 군사기지로 전변시켰습니다" 라고 김일성 동지는 말하였다.

 

《통감정치》와 전일적식민지통치권확립책동

 

- 일제는 《을사5조약》에 의한 《보호권》장악을 구실로 조선을 강점한 방대한 침략무력에 의거하여 불법적인 《통감정치》체제를 수립하였다.

○ 1905년 11월 22일 일제는 《통감 및 리사관에 관한 칙령》을 조작공포하였으며 12월 20일에는 《통감부 및 리사청관제》를 제정하였다.

○ 일제는 1906년 2월 1일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또 히로부미를 초대《통감》으로 파견하였으며 지방에는 10여개의 《리사청》 또는 《리사청지청》을 늘여놓고 《리사관》들을 파견함으로써 《통감정치》체제를 수립하였다.

일제에 의하여 세워진 《통감정치》체제는 철저히 불법적인 식민지통치체제였다. 그것은 《통감정치》체제가 허위날조된 《을사5조약》에 의한 《보호권장악》을 구실로 세워졌기때문이다.

《통감정치》체제가 수립됨으로써 우리 나라에는 2중통치체제 즉 본래의 봉건정부체제와 일제《통감부》의 통치체제가 존재하게 되였다.

여기에서 기본은 《통감정치》체제였다. 그것은 조선봉건정부의 중요부서들이 이미 일제가 파견한 《고문》들에 의하여 간섭과 통제를 받고있었기때문이다.

- 일제는 《통감정치》를 통하여 조선에 대한 전일적인 식민지통치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책동하였다.

○ 일제는 친일괴뢰내각을 련이어 조작하고 《고문》제를 전면적으로 강화하였다. 

○ 일제는 《정미7조약》을 조작하고 《차관정치》를 실시하여 봉건정부의 《정치권》을 완전히 빼앗아냈다.

일제는 《헤그밀사사건》을 구실로 1907년 7월 24일《정미7조약》(일명《한일협약》)과 그것을 구체화한 《한일협약규정실행에 관한 각서》를 조작하였다. 

이 《조약》을 통하여 일제는 조선의 립법권과 내정권, 관리임명 및 파면권, 외국인고용금지권 등 여러가지 권리를 장악하였다.

○ 일제는 1907년 8월 1일 조선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명목상 남아있던 봉건정부의 사법권과 경찰권마저 빼앗아냈다. 

○ 일제는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을 조작하여 우리 나라의 국호와 조선봉건정부의 존재자체를 없애버리고 조선에 대한 전일적인 식민지통치권을 확립하였다.

일제는 이 강도적인 《조약》에서 조선의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왜왕에게 넘기며 조선을 일본에 《병합》한다는것을 규정하였다.

1909년 7월 6일 일본내각회의에서 《한국의 병합을 단행할것》을 결정하고 친일매국역적들로 하여금 이른바 《한일합병청원운동》을 벌리도록 사촉하였다. 이에 따라 송병준을 우두머리로 하는 《일진회》역적들은 1909년 12월 4일에 일제가 꾸며준 《합병청원서》를 《통감부》와 일본정부 그리고 친일매국정부에 제출하는 매국행위를 감행하였다. 교활한 일제는 《일진회》의 《합병청원서》가 발표되자 한편으로는 그것이 조선《민중을 대표한것》인듯이 떠들어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통감》소네를 내세워 저들은 마치도 조선을 《합병》할 의사를 가지고있지 않는듯이 딴전을 부렸다. 일제는 극악한 군국주의자인 륙군대신 데라우찌를 《통감》으로 새로 임명하고 그로 하여금 헌병과 경찰들로 왕궁과 매국정부의 주요부서들을 포위한 다음 리완용일당과 《조약》을 조작하게 하였다. 일제에 의하여 강요된 이 《조약》은 철저히 불법무효한것이였다.

 

독점적이며 무단적인 통치체제의 수립과 중세기적공포정치의 실시

 

- 일제는 우리 나라를 비법적으로 강점한후 독점적이며 무단적인 식민지통치체제를 수립하였다.

○ 일제는 악질군벌출신 《총독》을 우두머리로 하는 《총독부》를 설치하고 방대한 침략군대를 끌어들여 전국에 배치하였으며 헌병경찰제도를 전례없이 강화하였다.

• 일제는 제19사단과 제20사단을 새로 편성하여 조선에 끌어들여다가 집중배치하였다.

 

                                                                                     조선주둔 일본군 제20사단의 전신 혹가이도주둔병

 

일제는 1912년부터 식민지통치를 무력으로 담보할 목적밑에 조선에 2개 사단을 상주시킬데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을 실현시키려고 책동하였다. 그후 1915년에 이것이 정식 결정되여 1916년 4월부터 1919년 2월까지 라남에 제19사단이, 1919년 4월부터 1921년 4월까지 룡산에 제20사단이 각각 배치되였다. 보병 2개 사단가운데서 제20사단은 서울과 룡산을 중심으로 평안남북도의 국경지대와 중남부조선의 중요지대들에, 제19사단은 함경남북도의 국경지대와 중요도시들에 주둔하였다. 각 사단에는 2개의 보병려단과 4개의 보병련대, 1개의 기병련대, 1개의 포병련대가 배치되여있었으며 무력은 1만 2 000명정도였다.

• 일제는 헌병경찰제도를 더욱 강화하였다.

○ 일제는 각종 악법들을 조작하고 전국도처에 감옥과 류치장, 구류소들을 설치하였다.

이와 같이 일제의 무단통치체제의 특징은 세계제국주의의 식민지통치력사상 일찌기 그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독점적이며 무단적인 악랄한 성격을 띠고있는것이다.

- 일제는 전대미문의 중세기적공포정치를 실시하였다.

○ 초대《총독》데라우찌는 《조선사람은 일본법률에 복종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죽어야 한다.》는 식민지폭압정책을 내세우고 방대한 폭압기구와 악법들에 의거하여 이 망발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였다.

• 일제는 조선인민에게 초보적인 민주주의적자유와 권리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 일제는 우리 인민의 반일투쟁과 애국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하였으며 수많은 인민들을 야수적으로 학살하였다.

일제는 조선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이시며 불요불굴의 반일혁명투사이신 김형직선생님께서 조직지도하신 조선국민회관계자 100여명을 검거투옥하고 야수적고문을 가하는 죄행을 감행하였다.

일제는 또한 3.1운동참가자들을 야수적으로 탄압학살하였다.

일제의 식민지무단통치하에서 우리 나라는 하나의 큰 감옥으로 전변되였으며 우리 인민은 정치적박해와 무권리를 강요당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일제는 이와 같은 야만적인 무단통치로써 조선인민을 굴복시키려고 하였으나 그 어떤 탄압과 박해도 슬기롭고 용감한 애국적인 조선인민의 반일애국투쟁을 결코 막을수 없었다.

 

교활한 《문화통치》와 식민지적폭압의 강화

 

3.1인민봉기에서 심대한 타격을 받은 일제는 1919년 8월부터 《문화통치》를 표방하였다.

일제가 들고나온 《문화통치》라는것은 한마디로 말하여 무단적포악성에 교활성을 결합시킨 간악한 식민지통치방식이였다.

- 일제는 《문화통치》의 간판밑에 무엇보다도 식민지폭압기구들을 일층 정비강화하였다.

○ 조선《총독》의 자격과 권한을 일부 개정하여 식민지통치에서 그 어떤 《완화》를 가져올듯이 가장해나섰다.

일제는 이 시기 문관들도 조선《총독》으로 될수 있고 《총독》이 가지고있던 군통수권도 조선주둔군사령관에게 요청하여 군대를 움직일수 있게 하는 등 《총독》의 자격과 권한을 일부 개정하는척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조선《총독》으로 해군대장출신인 사이또 마꼬도를 현역으로 복직시켜 임명하였으며 그후 식민지통치의 전기간 가장 악질적인 군인출신들을 조선《총독》으로 임명하였다.

○ 종전의 헌병경찰제도를 보통경찰제도로 《개편》함으로써 경찰제도를 《완화》하는것처럼 가장하였으나 실지에 있어서는 그것을 더욱 강화하였다.

일제는 보통경찰제도를 운운하면서 경찰기관과 그 인원수를 대대적으로 확장하여 전국을 더욱더 조밀한 경찰망으로 뒤덮었다.

○ 조선주둔군침략무력도 대대적으로 증강하였다.

- 일제는 조선인민의 반일운동대렬을 분렬와해시키며 조선인민의 혁명적진출을 가로막으려고 책동하였다.

○ 《민의창달》이라는 기만적구호밑에 《중추원》을 확장하고 도《평의회》, 부, 읍, 면《협의회》를 조작하였다.

이것은 조선인민에게 그 어떤 참정권을 주기 위한것이 아니라 친일주구들을 더 많이 긁어모아 식민지통치지반을 꾸리기 위한것이였다.

○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라는 기만적구호밑에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부르죠아출판물들의 발간을 허가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 4월 1일에 《동아일보》가, 1920년 3월 5일에 《조선일보》가 발간되였다. 이것은 부르죠아상층을 회유매수하며 조선말신문과 잡지들을 통하여 식민지통치를 찬미하고 민족개량주의를 퍼뜨려 조선인민의 민족적 및 계급적각성을 마비시키려는것이였다.

- 일제는 《문화통치》하에서 우리 인민에 대한 탄압과 학살만행을 야수적으로 감행하였다.

일제는 날로 강화되는 우리 인민의 로동운동과 농민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한편 국내외에서 우리 인민에 대한 대중적인 탄압학살만행을 감행하였다.

○ 일제는 1926년 6.10만세시위투쟁을 4 000여명의 경관과 수백명의 헌병들을 동원하여 야수적으로 탄압하였다.

○ 일제는 간도지방에서도 조선사람들에 대한 잔인한 학살만행을 감행하였다. 1920년의 《경신년간도대토벌》은 그 대표적실례로 된다.

○ 일제는 일본에서도 조선사람들에 대한 야수적학살만행을 감행하였다. 일제는 1923년 간또대학살사건을 조작하여 일본에 건너가 살고있던 조선사람들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이러한 학살만행들은 중세기적야만성과 사무라이적호전성을 체질적본성으로 타고난 일본제국주의자들만이 감행할수 있는 대살륙만행이였다.

이와 같이 《문화통치》시기에 우리 인민에 대한 일제의 야수적폭압과 학살만행은 오히려 그 이전시기에 비해 더욱 강화되였다.

 

전대미문의 파쑈적폭압과 강제련행만행

 

일제침략자들은 1920년대 말~1930년대 초에 이르러 이른바 《문화통치》의 간판마저 줴버리고 공공연한 파쑈적폭압을 감행하는데로 넘어갔다. 그것은 이 시기 일제가 동아의 《맹주》가 되려는 야망밑에 대륙침략계획을 발광적으로 추진하게 된것과 직접 관련되였다.

일제는 조선을 대륙침략을 위한 《교두보》로, 《공고한 후방기지》로 전변시키려는 야망밑에 1931년 9월 저들의 만주침략을 계기로 조선인민에 대한 파쑈적폭압을 전례없이 강화하는 길에 들어섰으며 그것은 1937년 7월 중일전쟁도발과 관련하여 더욱 강화되고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도발이후 최고절정에 이르렀다.

- 일제는 전대미문의 파쑈적폭압체제를 수립하였다.

○ 놈들은 파쑈적식민지폭압기구들을 대대적으로 확장하였다.

• 일제는 조선주둔군무력을 계속 늘여 조선을 군사적폭압망으로 완전히 뒤덮고 경찰폭압기구를 대대적으로 늘이였다.

조선에 투입된 일제침략군무력은 1932년현재 10여만명, 패망직전에는 34만명이상에 달하였다.

○ 일제는 우리 인민들을 침략전쟁에로 내몰기 위한 《국민정신총동원조선련맹》, 《조선방공협회》등 파쑈단체들을 조작하였다.

○ 일제는 여러가지 파쑈악법들을 새로 조작하거나 개악하였다.

1936년 12월에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을, 1941년 2월에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을, 1941년 3월에 《개정치안유지법》을 조작하였다. 이밖에도 《국가총동원법》과 《군기보호법》, 《국방보호법》 등 수많은 파쑈악법들을 조작하였다.

- 일제는 우리 인민에 대한 파쑈적폭압과 학살만행을 감행하였다.

○ 일제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를 비롯한 초보적인 민주주의적자유와 권리마저 깡그리 짓밟고 우리 인민에게 오직 노예적굴종만을 강요하였다.

일제는 1936년 8월 《일장기말소사건》을 계기로 개량주의적부르죠아신문들인 《동아일보》를 1년간 정간시키고 《조선중앙일보》를 페간시켰으며 1940년 8월에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완전히 페간시켰다. 그리하여 일제강점말기 조선에는 파쑈적인 어용단체외에 그 어떤 정치적결사나 사회단체도 합법적으로 존재할수 없었으며 출판물도 오직 《총독부》의 신문만이 남게 되였다.

- 일제는 우리 인민에 대한 악랄한 강제련행학살만행을 감행하였다.

○ 일제는 수많은 조선의 청장년들을 침략전쟁의 대포밥으로 강제련행하였다.

일제는 1938년 초부터 《지원병》제를 실시한데 이어 1943년부터는 《학도병》제를, 1944년 4월부터는 《징병》제를 실시하였으며 1945년 6월에는 《국민의용병법》을 조작공포하였다. 이 악법에 따라 남자 15살부터 60살까지, 녀자 17살부터 40살까지의 조선사람들이 일제의 침략전쟁터에 끌려나갔다.

○ 일제는 우리 인민의 로동력을 모조리 징발하여 탄광, 광산, 군수공장들과 군사시설건설장들에서 혹사시켰으며 집단학살하였다.

일제는 1939년 1월 《국민징용령》을 실시하여 수백만명의 조선사람들을 조선국내와 일본, 중국대륙, 싸할린, 동남아시아 등 지역의 고역장에 강제련행하여 그들의 피땀을 짜냈으며 패망말기와 직후에는 비밀보장이라는 구실밑에 집단적인 학살을 감행하여 대부분의 조선사람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였다.

○ 특히 일제는 20만명의 조선녀성들을 일본군성노예로 강제련행하여 성노예생활을 강요하는 반인륜적범죄행위를 감행하였다.

일본군성노예범죄는 일제에 의해 감행된 국가범죄이며 인류사와 세계전쟁사에 있어본적이 없는 특대형의 반인륜적범죄이다.

일본침략군처럼 전쟁마당에 성노예까지 끌고다니며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사람들을 도살한 군대는 세계전쟁사에서 더는 찾아볼수 없을것이다.

일제는 징병, 징용 등 각종 명목으로 840만여명의 조선사람들을 강제련행하여 그가운데서 100만여명을 학살하였다.

이처럼 일제는 조선을 발판으로 하여 《대동아공영권》의 꿈을 실현해보려고 조선에서 력사상 전례없는 가장 포악한 식민지파쑈폭압통치와 학살만행을 감행한 우리 인민의 철천지원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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