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왕릉과 그 주변의 력사유적들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에 가면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를 자랑하는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였던 고구려를 세운 동명왕의 무덤이 있다.
고구려사람들은 강국으로서의 고구려봉건국가를 창건하고 그 기틀을 마련한 동명왕을 신적인 존재로 숭배하였으며 그의 무덤도 특별히 잘 꾸리였다.
원래 동명왕의 무덤은 그가 활동하다가 사망한 고구려의 첫 수도인 졸본에 있었으나 5세기 중엽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현재의 위치에 가져왔다.
동명왕릉이 있는 지대는 산과 강들이 적당히 배합되여있어 살기좋고 경치아름다운 곳이였다.
그러나 외래침략자들의 릉도굴과 파괴행위로 말미암아 제대로 보존관리되지 못하고있었다.
한없이 숭고한 조국애, 민족애를 지니신 김일성 동지는 파괴손상된 동명왕릉을 고구려시조왕의 무덤답게 손색없이 꾸리도록 현명하게 이끌어주시였다.
민족의 슬기와 존엄을 빛내이시려는 수령의 높은 뜻을 받들어 김정일 동지는 동명왕릉을 겨레에게 민족적긍지와 애국심을 북돋아주는 력사유적으로 훌륭히 꾸리는데서 나서는 모든 문제들을 최상의 수준에서 풀어주시였다. 하여 동명왕릉은 짧은 기간에 훌륭히 개건되여 1993년 5월에 준공하였다.
동명왕릉은 고구려시조왕의 무덤답게 천년강국이였던 고구려의 위용을 시위하듯 웅장하게 솟아있다.
돌칸흙무덤인 동명왕릉의 무덤무지는 방대형이며 높이가 11.5m, 무덤한변의 길이는 34m이다.
왕릉의 정면에는 돌상과 돌등 그리고 범조각상이 있고 좌우앞으로 오이와 마리, 송양, 재사를 비롯한 문관들과 부분노와 묵거, 무골 등 무관조각상들, 그들이 타던 말조각상들이 세워져있다. 무덤구역의 아래단에는 동명왕의 출생과 활동,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력사적사실들이 씌여져있는 《고구려시조동명성왕비》와 《고구려시조동명성왕기적비》가 세워져있다.
동명왕릉으로부터 약 120m 떨어진 곳에는 동명왕의 명복을 빌던 고구려시기의 사찰이였던 정릉사가 있다.
정릉사는 동명왕릉을 발굴하면서 주변의 유적들을 조사하는 과정에 알려져 발굴되였다. 정릉사는 고구려사람들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겨오기 위한 준비사업의 일환으로 393년에 지은 사찰이다.
정릉사의 부지면적은 3만 7 000㎡로서 세나라시기 사찰들가운데서 규모가 제일 클뿐아니라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있다. 즉 크게 다섯개구역으로 나뉘여져있는데 그 안에 18채의 크고작은 건물들과 탑이 있었고 매 구역과 구역, 건물들사이는 회랑으로 련결되여있다.
정릉사는 8각탑을 중심으로 그 북쪽과 동쪽, 서쪽에 세채의 금당을 배치한 구조의 사찰이다. 이와 같은 1탑 3금당식사찰은 고구려에만 있다.
이밖에 동명왕릉주변에는 19기의 고구려시기의 돌칸흙무덤들이 분포되여있다. 무덤들에는 동명왕과 함께 고구려를 세우는데 참가하였거나 외래침략자들을 물리치는 싸움에서 용맹을 떨친 승우, 오이, 부분노, 고승, 마리, 고흡, 부위염, 다해환노, 갈로, 맹광, 온달 등 장군들과 대신, 학자들이 묻혀있다.
동명왕릉주변의 고구려무덤들은 마치 왕릉을 호위하는것처럼 배치되여있다. 그것은 당시 사람들이 동명왕이 살아있었을 때는 물론 죽은 후에도 충신들의 호위를 받고있다고 생각한것과 관련되여있다.
오늘도 동명왕릉은 공화국의 문화보존정책에 의하여 고구려의 시조릉답게 잘 보존관리되고있으며 겨레에게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더욱 북돋아주는 귀중한 민족문화유산으로 빛을 뿌리고있다. <저작권자 ⓒ 프레스아리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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