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국의 품에서 참된 삶을 빛내 인 시인
… 메마른 가시밭을 울고울며 네 왔느냐 거친 길 에돌면서 외로웁던 시내물아 불행에 감겨 찢겨진 몸을 시름놓고 맡긴 곳은 아 인정의 바다 사랑의 바다 … 공화국인민들이 누구나 알고 즐겨 부르는 이 감동깊은 노래가사는 곡절많은 인생길을 걸어 사랑의 바다에 안긴 작가 오영재선생이 창작한것이다.
하다면 그는 어떤 인생길을 걸어왔기에 공화국의 품을 인정의 바다, 사랑의 바다라고 목메여 웨치였는가.
주체문학발전에 빛나는 공헌을 한 영웅시인인 오영재선생의 값높은 인생은 공화국이야 말로 우리 민족이 자기의 운명을 전적으로 맡기고 살 진정한 요람, 참다운 조국이라는 진리를 다시금 새겨주고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작가 오영재선생처럼 인생길에 선택이 얼마나 중요하며 그 선택이 무엇에 기초해야 하는가를실생활체험을 통해 심장으로 절감한 사람도 드물것이다.
지금으로부터 70여년전인 1950년 마가을에 있은 일이였다. 설악산릉선을 타고 북쪽을 향하여 씩씩하게 행군하는 인민군대렬에서 두 전사가 떨어져나왔다.
《잘 생각해봐. 북에 가면 누가 있어? 그러지 말구 고향에 돌아가 부모님들을 모시고 조용히 살자. 아무렴 싸움을 그만두고 돌아온 우릴 죽이기야 하겠어?》
이제 겨우 열다섯살이였던 오영재선생에게 함께 입대한 고향청년이 하는 말이였다. 오영재선생의 생각은 착잡하였다. 앞서간 대오를 따라 북으로 들어가야 하는가? 아니면 고향사람의 말대로 어머니와 형제들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갈팡질팡 방황하던 그때 북행길에 오른 한 인민군군관을 만나게 되였다. 그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듣고난 군관은 이렇게 말하였다.
《…동무들은 인민군대가 후퇴한다니까 마음이 흔들린 것같은데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는 최고사령부로 간다. 최고사령부는 곧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이시다. 장군님께서 계시는한 우리는 이 전쟁에서 반드시 이긴다. 동무들도 장군님의 전사들이 아닌가.》
인민군군관의 확신에 찬말은 나약해졌던 오영재선생 을 정신이 번쩍 들게 해주었다. (나는 인민군전사다. 가자, 김일성장군님의 품으로!) 《군관동지, 전 북으로 가겠습니다.》
이렇게 되여 오영재선생은 북행길이냐 고향길이냐 하는 인생의 두갈래 갈림길에서 최고사령부를 찾아가는 인민군대오의 신념의 보무에 자기의 발걸음을 맞추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가 선택한 북행길은 그의 길지 않은 인생체험으로부터 체득한 진리의 선택이기도 하였다.
1935년 11월 전라남도 장성군의 청빈한 교원가정에서 7남매의 둘째아들로 출생한 오영재선생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정의감이 강하였다고 한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천대와 멸시속에 살아야만 했던 그 세월 정의감때문에 부자집자식들과 쩍하면 싸웠고 그로 하여 부모의 속 을 많이 태웠다고 한다.
1945년 8월 드디여 일제가 패망하고 조국이 해방되였다. 하지만 일제를 대신하여 미국이 군사적으로 강점한 남조선땅에서 그가 맛본것이란 여전히 일제때와 다름없는 착취와 억압, 빈궁과 무권리 뿐이였다. 《해방자》의 탈을 쓰고 기여든 미군은 결코 《해방군》이 아니였고 미국제군화를 신고 미국제무기로 무장한 남조선군은 진정한 민족의 군대가 아니였다.
전쟁은 진짜와 가짜를 판별할수 있게 하는 시금석이기도 하다. 아침은 해주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고 떠들면서 조선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달았던 침략세력은 남의 집에 들어갔다가 주인에게 얻어맞고 쫓겨난 도적무리처럼 황황히 남으로 밀려내려왔다.
어느날 가까운 곳에서 쿵- 쿵- 하는 포소리가 들려오더니 전라남도의 궁벽한 산골마을인 오영재선생의 동네에도 인민군대가 공화국기를 날리며 들어섰다. 질풍같이 달려오던 자동차들이 갑자기 멈춰섰다. 한 인민군군관이 달려와 오영재선생의 집앞에 펴놓은 벼단들을 잠시 바라보더니 자동차대렬에 손짓하였다. 그러자 주런이 늘어섰던 차들이 후진하여 마을뒤로 난 소로길로 돌아가는것이였다. 황급히 벼단을 거두던 그의 어머니는 너무 감심하여 혀를 차며 말했다.
《역시 인민군댄 영 다른 군대로구나.》
한해전 이맘때 이 길로 남조선군의 자동차들이 미친듯이 달려왔다. 그것들은 오영재의 집만이 아닌 이웃집들에서 펴놓은 벼단들을 사정없이 깔아뭉갰다. 말그대로 군복입은 강도의 무리였다. 오영재선생은 자기들도 넉넉치 못한 식량을 살림이 어려운 세대들에 아낌없이 나누어주고 위험을 무릅쓰고 우물에 빠진 드레박을 건져주는 인민군군인들의 모습에서 백성을 위하는 참된 군대를 보았다. 그 모든것은 열다섯살의 어린 그가 의용군에 탄원하게 된 직접적동기이기도 하였다.
원래 그는 어릴 때 물속에도 진창에도 덤벙덤벙 뛰여들군 하여 별명이 《덥석》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의용군 입대를 탄원한 그 의기는 결코 10대의 소년들이 흔히 덥석 빠지군 하는 감상적인 용감성이 아니였다.
김일성장군님의 품으로 가자! 오영재선생의 선택은 피눈물나는 생활의 체험이 내린 용단이였고 비록 단 하루의 새 생활이였다 해도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의 정치가 옳고 공화국제도가 진정한 인민의 세상임을 절감한 열렬한 정의감이 떠밀어준 선택이였던것이다. 하지만 그는 북을 향하여 내짚은 그 발걸음이 앞으로 자신에게 어떤 행운을 가져다줄것이라는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인정의 바다 , 사랑의 바다
언제인가 오영재선생은 이 런 물음을 받은적이 있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혼자서 얼마나 외로웠겠는가고, 철없을 때 떠나간것이 이제 와서 후회되지 않는가고.
그때 그는 단호히 머리를 저었다. 혈육들이 한지붕아래서 한생을 살아가는것을 누군들 바라지 않겠는가, 그러나 남조선에 그대로 머물러있었다면 자그마한 인생의 울타리 밖을 단 한걸음도 벗어나지 못했을것이고 해빛이 찬란히 비치는 밝고 아름다운 세계를 영영 모르고 한생을 마쳤 을것이라고.
이것은 그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진정의 토로였고 심장의 웨침이였다. 어찌 그렇지 않을수 있겠는가. 공화국의 품에 안길 때 오영재선생은 평범한 병사였다. 재산이란 군용배낭 하나뿐, 말그대로 두주먹뿐이였다. 거기에다 고향이 남조선인 그에게는 북에 가족, 친척들도 없었다. 말그대로 혈혈단신이 였다.
그러나 공화국에서는 평양의 어느한 건설사업소에서 로동을 하던 그에게서 본인도 모르고있던 문학적재능의 싹을 발견하고 소중히 여겨 그를 작가학원(당시)에 불러주었다. 그때부터 그는 국가의 따사로운 손길이 어린 교복을 입고 무의무탁생으로서 다른 학생들보다 두배나 되는 장학금을 받으며 2년간 문학공부를 하게되였다.
그가 참된 삶의 닻을 내린 공화국은 어머니를 대신해주었고 혈육을 대신해주었다. 아니, 부모도 혈육도 미처 줄수 없었던 사랑을 주고 정을 부어주었다.
하기에 오영재선생은 자기가 지은 첫 시가 발표될 때에도, 동지들의 따뜻한 축복속에 결혼식을 하고 첫 자식이 태여나던 날에도, 국가의 배려로 외국에 가족휴양을 떠나고 위대한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생일상을 받을 때에도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잠 못들군 하였다. 낳아준 어머니보다 더 따뜻하고 극진한 사랑으로 키워주고 내세워준 당과 국가의 은정이 너무 고맙고 그 위대한 사랑과 인정의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전하지 못하는것이 괴로웠다.
1978년 가을 서사시창작을 위해 반년나마 제강소에 현지체험을 나갔던 오영재선생이 생활에서 처신을 잘하지 못한것으로 하여 일부 사람들속에서 좋지 못한 반영이 제기되였을 때였다.
이를 두고 누구보다 마음쓰신분은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이시였다. 해당 부문 일군들을 부르시고 오영재가 어떤 사람인가, 그가 어떤 작품을 썼는가에 대하여 하나하나 알아보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심중한 음성으로 그 동무가 어린 나이에 혁명을 하겠다고 의용군에 입대하여 잘 싸웠다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더욱 리해할수 없는 일이라고, 우리는 지난날 남조선에서 못살고 천대받던 그에게 행복하고 보람찬 생활을 안겨 주었고 대학공부까지 시켜주었으며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영예로운 작가대렬에 세워주었다고 하시였다.
계속하시여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제강소에 내려가 그의 현지생활을 다시 구체적으로 료해할데 대한 과업을 주시였다. 며칠후 제강소에 내려갔던 해당 부문 일군들로부터 오영재가 현지체험기간 로동에 성실하고 인간됨도 좋았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믿음에 찬어조로 교시하시였다.
《나는 좋은 작품을 쓴 그 작가를 믿습니다. … 그는 우리와 한대오에 서있는 혁명동지입니다. 결함과 과오는 있지만 그것을 자신의 허물처럼 함께 가슴아파하며 고쳐주고 이끌어주고 함께 혁 명을 해나가야 할 귀중한 혁명동지란 말입니다.》
이어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형제들과 헤여져 수령님의 품을 찾아왔으며 지금까지 근 30년간 우리 당의 품속에서 자랐다, 그는 영광스러운 혁명대오에 서서 어려운 후퇴의 길도 걸었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전후복구건설도 하였으며 창작적열정으로 심장을 불태 우며 작품도 썼다, 그는 우리와 함께 혁명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며 우리가 공을 들여키운 작가이다, 작가의 가슴에 상처를 입히지 말고 창작을 시킬데 대하여 뜨겁게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고매한 풍모와 크나큰 사랑과 믿음에 감복한 오영재선생이 오래동안 고심한 끝에 서사시 《인민의 아들》을 완성하여 감사의 편지와 함께 그이께 삼가 올리였을 때에는 《당 에 충직한 시인》이라고 활달한 필체로 감사의 회답을 써 보내주시였다.
또한 1989년 5월 공화국의 최고상인 김일성상계관인의 영예를 지니도록 하여주시고 1977년과 1992년에 두차례에 걸쳐 어버이수령님의 존함을 모신 시계를 수여받도록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 주시였다. 그리고 1995년 12월 공화국공민의 최고영예인 로력영웅칭호를 수여받도록 해주시였다. 뿐만아니라 그가 년로하여 정상출근을 못하게 되자 자택작가로 글을 쓰도록 해주시고 새로 일떠선 살림집까지 배려하여주시였다.
흔히 사람들은 친어머니도주지 못한 사랑을 어머니당이 주고있다고 노래하군 한다. 오영재선생은 그 참뜻을 자신의 생활로, 한생을 통하여 깊이 체득하였다.
어느해인가 오영재선생의 어머니는 아들이 보내드린 옷감으로 곱게 지은 조선치마저고리를 입고 사진을 찍고나서 그 심정을 편지에 담았다.
《…사람이 자식을 낳은 것으로 부모가 아니지. 그애 장래와 전도에 이르기까지 책임을 지는것이 부모인데… 나는 너무도 부끄럽고 진토만도 못한 존재라 너에게는 더 말할것도 없구나. 너의 소식을 들으니 한이 풀리는구나. 내 이제 죽는다 해도 한이 없을것같다. …》 어머니의 편지를 읽으며 오영재선생은 흐르는 눈물을 걷잡을수 없었다.그 눈물은 어머니를 대신하여 자기를 소중히 품어주고 키워 내세워준 고마운 어머니조국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였다.
의용군출신의 시인 오영재선생의 가슴속에서는 이런 신념의 웨침이 울리고 또 울리였다. 절세위인이 계시는 공화국의 품이야말로 온 겨레가 안겨살 진정한 고향이고 조국이라고.
영생하는 애국의 삶
이 세상에는 시를 전문으로 쓰는 시인들이 헤아릴수없이 많다. 그들모두가 한결같이 바라는것은 아마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시를 쓰고 그 시와 더불어 사람들의 기억속에 영원히 남아있는 시인이되는것일 것이다. 하다면 공화국의 품에서 삶을 꽃피운 오영재선생은 과연 어떤 시들을 세상에 내놓았고 어떻게 되여 오늘도 조국과 민족이 사랑하고 기억하는 재능있는 시인으로 남아있는 것인가.
2012년 설날아침 눈물에 젖은 두볼을 훔치며 《로동신문》을 펼치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신문의 1면에 뜻밖에도 오영재선생이 쓴 가요 《조선의 힘》이 크게 실렸던것이다. 불과 두달전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 김일성상계관인이며 로력영웅인 오영재선생의 령구에 화환을 보내신 소식을 《로동신문》에서 보았던 그들이였다.
그런데 함박눈도 흐느끼며 쏟아지던 피눈물의 12월을 보내고 맞은 새해의 첫아침 《로동신문》 1면에 시인의 유고작이 실린것이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헤쳐오신 불멸의 선군령도업적에 대 한 력사의 총화와도 같은 송가이며 장군님을 영원히 높이 받들어모실 전체 인민의 철석같은 신념이 낳은 맹세의 합창곡인 《조선의 힘》은 나오자마자 폭풍같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사람들은 위대한 백두령장의 고귀한 업적을 칭송한 국보적인 그 작품이 어떻게 되여 세상에 나왔는가를 미처 다 알수 없었다. 오영재선생은 위대한 장군님을 운명의 태양으로 높 이 모시고 받든 시인이였다.
특히 오영재선생의 1980년대 작품의 최고봉을 이루는 작품인 가사 《흰눈덮인 고향집》은 자기의 운명을 지켜주고 보살펴주시는 위대한장군님에 대한 다함없는 충정의 결정체라고 할수 있다. 위대한 장군님의 자애로운 품속에서 보람차고도 영광스러운 창작의 길을 걸어온 그는 태양의 성지에 있는 백두산밀영고향집을 노래하고싶었다.
백두산밀영고향집이 안겨준 눈과 봄빛이라는 시적 발견은 오랜 기간 위대한 스승의 각별한 지도와 보살피심을 받으며 창작생활을 하는 과정에 체질화되고 생활화된 매혹과 신뢰감이 터친 환희였다. 사나운 눈보라에도 끄떡않고 거연히 솟아있는 정일봉과 떠오르는 아침해발속에 유난히도 빛나는 백두산밀영고향 집은 사나운 눈보라를 길들인 전설적인 위인의 모습으로 안겨들어 시인의 마음속에 세찬 격랑을 일으키였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작품은 세상에 고성을 울리는 그 순간에 벌써 온 나라 인민의 심장을 틀어잡았다. 온 나라 방방곡곡에서 울려퍼지는 위인칭송의 노래와 더불어 그의 이름도 더욱 유 명해졌다.
하지만 오영재선생은 위대한 장군님의 천출위인상을 아직 마음껏 노래하지 못한듯한 심정을 금할수 없었다. 자신을 더욱 채찍질하며 불타는 창작의 열정으로 낮과 밤을 보내던 그는 불치의 병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에도 미구에 끝이 날 한생에 대한 걱정보다도 어머니조국을 위해 한편의 시라도 더 쓰지 못하는것을 두고 안타까와하였다.
70고령의 생을 두고 짧다고 생각한적이 한번도 없었던 오영재선생이였지만 그때만은 꺼져가는 한초한초를 무척 아까와하며 가요 《조선의 힘》을 한자한자 완성해나갔다. 참으로 《조선의 힘》은 위대한 장군님을 조선의 하늘로 높이 모시고 받든 시인 오영재선생의 심장이 뿜어올린 시대의 명곡, 시대의 찬가였다. 하기에 오영재선생이 림종의 시각에 애타게 찾은분도 수십년세월 자신의 생을 지켜주고 빛내여주신 위대한 장군님이시였다.
2011년 10월 오영재선생이 사망했다는 비보를 들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못내 가슴아파하시며 오영재만한 시인이 다시 나오겠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며 그의 애국의 삶을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그리고 신문과 방송에 부고를 잘 써서 내고 장례는 기관장으로 하며 화환을 보내도록 해주시였다. 뿐만아니라 고인의 령구를 신미리애국렬사릉에 안치하며 가족들을 위로하는 위로연까지 차려주도록 하여주시였다.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께서는 《조선의 힘》뿐만 아니라 오영재선생의 유고작들을 《로동신문》에 내도록 해주시고 유가족들에게 대를 두고 전할 뜨거운 사랑을 안겨주시였다.
시인 오영재! 그는 온 겨레가 운명도 미래도 맡길 품은 과연 어디인가를 자신의 곡절많은 인생행로를 통해, 격조높은 시를통해 말해준 민족의 한 성원이였고 겨레가 두고두고 기억할 참된 작가였다.
시인 오영재선생이 공화국의 따뜻한 품에 안겨 써낸 시작품은 무려 1000여편에 달한다. 그 많고많은 시들과 가요들은 참된 조국의 품에 안긴 인간의 삶은 영생한다는 진리를 사람들에게 깨우쳐주며 민족의 력사속에 끝없이 울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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