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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륵관현악단】 민족대단결의 숨결을 찾아서 (4)

사회주의낙원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

프레스아리랑 | 기사입력 2023/06/19 [21:53]

【우륵관현악단】 민족대단결의 숨결을 찾아서 (4)

사회주의낙원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

프레스아리랑 | 입력 : 2023/06/19 [21:53]

우륵관현악단민족대단결의 숨결을 찾아서 (4)

 

사회주의낙원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

 

 

 

풍년이 왔네!

 

 

 

 

명곡청산벌에 풍년이 왔네는 찬란하게 펼쳐지고 있는 사회주의 농촌의 현실을 생생하게 음악에 반영하여 1960년에 창작된 국보적인 작품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나는 전체를 위하고 전체는 하나를 위한다는 하나의 대가정즉 집단주의 사회의 아름답고 생생한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한다.

 

 

 

유월의 청산벌은 유난히도 분주하다. 모내기를 제때에 끝마치자면 서둘러서 보리타작을 끝마쳐야 한다. 가을에 쌀 풍년을 맞이하려는 농민들의 손놀림은 빨라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농업근로자들은 자기들의 삶의 터전 청산벌에 황금물결 출렁이는 대풍년을 안아오고 살기 좋은 사회주의 이상향을 건설하기 위해 일손을 놓지 못한다. 농장원들은 근면하고 성실하면 만풍년의 소원도 이루게 되고 다수확의 기쁨도 안아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민들에게 행복의 낙원을 안겨주시려고 한평생 포전길을 걷고 또 걸으신 주석님의 평생소원이자 온 나라 근로대중들의 이상향의 꿈이 이 곳 청산리에서부터 꽃펴나고 있는 것이다.

 

 

 

주체 농법으로 과학화, 기계화, 선진화된 문명한 사회주의의 이상촌 청산벌은 이제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게 되었다. 집약화된 땅에는 남새농장이 들어서고 조성된 풀판마다 황소, 젖소, 염소, 토끼, 돼지들이 떼지어 뛰놀고 양어장마다 철갑상어, 메기, 칠색송어들이 팔딱거린다. 복받은 농장우에 약뿌리고 씨뿌리고 관리하는 드론이 날고 모내기부터 수확까지 완전히 기계화, 자동화로 청산벌은 그야말로 살기 좋은 인민의 낙원으로 전변되었다. 인민의 낙원에서 행복의 꿈을 펼치는 농업근로자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는 온 나라를 더욱 명랑하게 하고 활기차게 해주고 있다.

 

 

 

194635일 북조선토지개혁 법령이 선포되다

 

 

 

법령에는 일본인이 소유한 토지와 조선인지주들이 소유한 토지를 개혁하고 소작제를 철폐하는데 있다고 하였는데 이들 토지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에 따라 토지의 이용권을 밭갈이하는 전체 농민에게 나누어 준다고 명시하였다.

 

 

 

법령에 따라 평생처음으로 자기의 땅을 받아 안은 청산리농민들의 행복에 겨워 흥성거리는 모습을 현지에서 체험하면서 느낀 감동적인 장면을 작곡가 김옥성은 선율에 담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태어난 관현악과 합창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는 근로대중들의 절찬을 받는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되었으며 애호가들의 뜨거운 호응속에 끊임없이 연주되고 있다.

 

 

 

어느날 김일성주석의 부름을 받은 김옥성은 전선에서 국토의 완정과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싸우는 인민군 병사들의 투쟁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체험하면서 후대들에게 전해줄 명곡을 창작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의를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종군작곡가 김옥성은 결전의 길로’, ‘강선은 천리마의 고향’, ‘전호속의 나의 노래, 교향곡 압록강등 규모가 큰 대작들을 많이 창작하였고 인민이 애창하던 그의 노래가 후비 작곡가들에 의해 독주곡, 협주곡 또는 관현악곡으로 편곡되어 더 많이 연주되고 있다. 2016년 나라에서는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100세 기념음악회를 성대하게 열어주었다.

 

 

 

관현악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

 

 

 

실바람 소리 같은 현악기의 고요한 떨림소리(Tremor)와 하프의 부드러운 분산화음(arpeggio)을 타고 흘러나오는 호른소리는 이른 새벽의 농촌풍경을 화폭에 담아내고 있는 듯하다. 이른 새벽의 논둑길을 따라 걸으며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는 청산벌의 농촌풍경을 잘 묘사하였으며 유창하고 여유있는 플루트독주는 청산리 농민들의 평화로운 감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2주제가 끝나면 풍년이 든 황금평야를 바라보는 농부들의 행복한 모습이 잘 묘사하였고 제시부에서 연주되는 강렬한 주제(主題)는 기쁨에 넘쳐 풍년을 노래하는 청산리 농민들의 역동적인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부주제는 주제가 이끌어 온 풍년가의 흥겨운 휘모리장단을 최고조로 끌어 올려

 

청산벌의 일상생활을 더욱 생동감있게 보여주고 있다. 개량민족악기인 새납을 관현악에 투입시킨 사실을 가리켜 관현악 편곡사상에 일어난 가장 파격적이고 과감한 시도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재현부에서는 최고조에 오른 농민들의 춤판에 새납독주가 흥을 최고조로 끌어 올리며 절정을 장식해준다. 음악은 점점 더 흥성거리고 격렬해진다. 금관악기가 연주하는 풍만하고 가슴 후련한 음향은 만풍년을 안아온 농민들의 희열과 긍지가 하늘땅에 차넘치는 듯하여 준다. 주선율이 곡의 종결부에서 다시 우렁차게 울리며 극적으로 곡을 끝맺는다.

 

 

 

이 곡은 이제 북의 교향악단에서 뿐만이 아니라 이남의 악단에서도 가끔씩 연주되고 있으며 해외에서도 연주되고 있다. 조선국립교향악단의 원로지휘자 고 김병화선생, 국립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 채주혁선생 윤이상관현악단의 지휘자 김호윤이 지휘한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가 최고의 연주로 평가되고 있다.

 

 

 

나는 여기서 주체기악발전에 큰 공헌을 한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의 주체적 민족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곡자 김영규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김영규는 누구인가

 

 

 

작곡가 김영규는 1927810일 서울시 마포구 창진동에서 태어났다. 19393월 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경성사범학교에 다니면서 풍금연주와 음악이론을 공부하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자신도 신경질환을 앓고 있어서 공부를 계속할 수가 없게 되었다.

 

 

 

해방은 왔으나 미제에게 강점당한 이남사회의 현실은 무질서했고 어지러웠다. 생활형편이 날로 곤궁 해져서 음악학교에서 작곡법을 공부하려는 꿈은 일단 접을 수밖에 없었다. 19462월부터 고려교향악단의 연주가로 1948년에는 서울교향악단의 연주가로 일하면서 작곡법을 독학하였으나 나라가 불안하던 이남사회에서는 그의 꿈은 실현될 수가 없었다.

 

 

 

195073일 그는 의용군에 탄원하여 전선지구 경비사령부 협주단에 입대하였다. 이때부터 김영규는 인민군에 소속되어 연주활동도 하고 편곡, 작곡을 하기 시작했다 1950117일부터는 당과 정부의 조치에 의하여 국립예술극장에서 바순연주가로 일하면서 수많은 음악작품을 창작하였다. 이때 창작한 관현악 <보리타작>은 새로운 관현악의 창작기법을 시도하여 이북의 관현악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이시기에 관현악곡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 (1970)와 교향곡 <피바다> (1980) 등 수많은 관현악곡과 가극, 무용곡을 창작하였다. 사상예술적 작품성이 높은 경지에서 창작활동을 하여 김일성주석과 김정일위원장으로부터 찬사를 받았고 그의 창작작품들은 모두 음악의 경전과도 같은 <조선음악전집> 20권 중 제8권에 수록되어 나라와 민족의 귀중한 재보로 보존되고 있다.

 

 

 

북에서도 조선의 관현악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는 사회주의낙원에 대한 열렬한 찬가로서 인민들의 유다른 사랑을 받고 있다.” 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 관현악은 힘있고 경쾌한 새납의 음색, 양악기들과 예술적조화를 이루며 울리는 꽹과리를 비롯한 민족악기들의 장단과 선율이 멋지게 어우러지면서 흥을 돋우고 있으며 교향악적 특성도 잘 살려내고 있다.

 

 

 

처음으로 앙코르를 받아본 청산벌

 

 

 

특히 김정일위원장의 지도밑에 그가 창작한 관현악곡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는 민족적 특성과 현대적 감각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주체적 관현악음악의 최고중의 하나로 평가를 받고 있다.

 

 

 

김정일위원장은 관현악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는 아주 잘된 작품이라고 만족해하면서 오늘 공연에서 청중들로부터 재청을 받았다는데 이것은 정말 교향악단 연주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김영규를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음악예술에서 천재적인 풍모를 지닌 김정일위원장은 작곡자에게 작품의 핵심과 형상방도를 찾아주었으며 그가 창작을 착수하였을 때는 수차례에 걸쳐 손질하고 다듬어서 명곡을 탄생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온정을 베풀어주고도 김정일위원장은 김영규에게 창작적 시야를 넓히라고 1973년에는 아프리카 기네에 문화대표단으로 파견하여 주었으며 1975년에는 루마니아에 예술대표단으로 가도록 배려해 주었다고 한다.

 

 

 

김영규에게 베풀어진 최고의 사랑과 은정

 

 

 

그의 나이 50이 넘도록 당원이 되지 못한 것은 사연이 있었다. 이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김위원장은 그의 조선로동당 입당을 직접 결재(보증)하여 주었고 입당날짜도 당창건일인 1010일로 정해주는 파격적인 혜택을 누리게 해주었다.

 

 

 

 

 

김위원장은 그의 건강을 염려하여 녹용과 사향 같은 값비싼 고급약재들을 아낌없이 보내주는 한없는 사랑을 안겨주었다. 홀로 공화국 품에 안긴 그를 위해 부모의 심정으로 세심한 배려와 깊은 사랑을 베풀어 주었고 배려와 신임만 받아온 그는 자기의 작품창작을 통하여 나라의 은정에 보답하려는 결심으로 창작에 몰두하였다.

 

 

 

19896월 그가 창작한 교향곡 <피바다><청산벌에 풍년이 왔네>가 인민들이 사랑하는 명곡으로 창작된 성과를 취재하러 온 기자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이 작품들이 인민들의 사랑을 받는 명곡으로 창작된 것은 전적으로 음악예술의 영재이신 김정일동지의 현명한 영도의 결과입니다

 

 

 

기자선생도 잘 알다시피 나는 이남의 교향악단들에서 연주도 하고 작곡법도 독학을 해온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니 듣고 배운 것이 서유럽의 음악이었고 낡은 형식의 교향곡이었지요. 그러므로 쏘나타형식의 교향악이나 서구식 오페라 창작활동으로 머리가 굳어진 다음에 조국의 품에 안겨 참다운 예술활동을 하려 해도 당 앞에 심려만 끼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김정일위원장의 최고의 사랑과 배려를 받았고 비로소 민족적 예술성으로 다져진 그는 진취적이고 대중적인 기악곡과 교향악 영화()음악 작곡가로 거듭나게 되었다고 힘주어 말하며 로동당과 공화국정부의 품속에 영생하고 싶다는 지조를 지켜가겠다고 다짐하였다.

 

 

 

해와 별이 빛나는 주체의 조국에서 받아 안은 크나큰 은정에 보답하려고 자신의 창작적 정렬을 불태워 오던 그는 불치의 병으로 19891022일에 그의 생을 마감하였다.

 

 

 

비록 62세의 길지 않은 생을 살고 갔으나 김영규는 사회주의 조국의 품에 안기어 그의 음악적 재능을 마음껏 꽃피웠으며 김정일위원장의 각별한 보살핌 속에 주체음악의 대가로 성장하였다. 그가 작곡한 교향곡 <피바다>와 관현악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는 우리나라음악의 세계적이고 경전적인 음악으로 기억될 것이며 남이나 북이나 해외에 사는 우리민족의 마음속에 오래오래 간직될 것이다.

 

 

 

자력갱생과 일심단결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청산리협동농장은 오늘도 이민위천의 숭고한 가르침으로 빛을 내고 있다. 절세위인의 숭고한 이상과 꿈을 믿음직하게 실현하려는 예술인들의 순박하고 절절한 소원은 완벽하게 현실로 되고 있으며 기어이 최후승리의 감격을 안아오고야 말 결의에 불타고 있다.

 

 

우륵관현악단 리준무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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