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항일유격대원들의 삶과 투쟁
11. 무치허에서
김유길
화전현 북쪽에 무치허라는 강이 있다. 이 강 상류로 올라가면 좌우켠에 이깔, 분비, 잣솔, 가문비, 봇나무 등 산림자원이 울창한데 거기에는 일본인재벌이 경영하는 목재소가 있었다.
당시 나는 조선인민혁명군의 4사 경위중대에 속하여있었는데 1939년 정월 우리 부대는 무치허부근에 도착하였다. 우리가 최현동지의 인솔밑에 이곳에 도착한지 얼마안되는 날밤 200여명의 동지들이 또 여기에 왔다.
우리의 숙영지는 야산이 빙둘러있는곳인데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가 멀지 않았다. 주위는 온통 깊은 눈이였다. 그러므로 한번 행동하면 눈우에 발자국이 나군 하였으나 그 부근 농민들은 우리의 행동을 보장해주기 위하여 매일 멧마당(밭가운데 있는 탈곡장)에 있는 콩깍지나 짚을 발구에 싣고다니면서 그것을 알아볼수 없게 지워버렸다. 이리하여 우리는 자유롭게 행동할수 있었다.
그들은 우리 유격대가 자기들과 같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싸운다는것을 알고있기때문에 밤이면 자진하여 강냉이, 조, 수수, 콩, 팥 같은 식량을 져다주었다. 우리들은 이들과 련계를 강화하며 무치허목재소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였다.
목재소의 일본인 경영주놈은 조중 두 나라 로동자들을 값싼 임금으로 마소와 같이 혹사하면서 여기서 채벌한 목재를 멀리 일본에 날라갔다. 무치허에 모인 목재로동자들의 다수는 원래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였다. 그들이 지주들의 착취에 시달리고있을 때 경영주놈은 《목재소가 경기 좋다.》고 기만하여 끌고왔다. 그리하여 멀고 가까운곳에서 농민들이 여기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이곳도 그들의 생활을 안착시킬수는 없었다. 그들은 값싼 임금에 허덕이며 그날그날 겨우 목숨을 이어나갔다. 로동자들이 무슨 의견을 말하면 경영주놈은 《빌어먹을 자식들! 일이나 더 잘해라. 썩은 강냉이도 주기 아깝다.》고 욕질을 하군 하였다.
그놈의 꾀임에 들어 목재소에 올 때 자기의 소와 말을 가지고온 사람들도 있었는데 빚때문에 일년도 못되여 그것을 목재회사에 넘겨주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소까지 빼앗긴 사람은 도로나가 농사를 짓기도 난처한 일이였다.
로동자들은 오도가도 못하게 되였다. 그들의 가족은 몸에 걸칠것도 없었다. 살을 에이는듯한 추위에 아침일찍부터 어두울 때까지 혹사당하면서도 나무에 치여 몸이나 상하는 날이면 온 가족의 목숨이 떨어지는 판이였다. 로동자들속에서는 목재소경영주놈에 대한 원성이 높았다.
그들은 모두 《유격대가 와서 이놈의 목재판을 없애치웠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로동자들을 해방시키며 그들에게 혁명적영향을 주는 동시에 우리의 식량을 해결하며 목재를 일본으로 실어가는것을 파탄시킬 목적으로 이 목재소를 습격하게 되였다.
목재소에는 산림경찰대놈들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일본지도관놈이 있었다. 전투에 앞서 유격대에서는 목재소에 사복을 한 정찰원들을 파견하였다. 나는 이 전투가 진행되는 날밤에 련대의 참모장, 그의 련락병과 함께 셋이서 밤중에 부대의 선두에서 목재소로 향하였다. 우리들은 은밀히 목재소근방에 접근하였다. 목재소주위에는 나무로 쌓은 높은 울타리가 있었다. 그 울타리는 통나무의 아지를 따지 않고 밑둥아리가 안에 놓이고 끄트머리가 밖으로 나오게 하여 안으로 들어가려면 나무아지들이 가로세로 엉켜 몸을 들이밀 방도가 없었다. 밟으면 《와싹! 와싹!》소리가 났다.
우리는 침착하게 서두르면서 주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한곳에 송아지와 망아지들이 넘나들어 나무가 푹 낮아진곳도 있었다.(목재소에는 소와 말이 1,000여마리나 있었다.)
우리는 그곳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공지를 좀 지나자 말들이 투레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참모장과 함께 말먹이는 로동자에게 가서 경찰대놈들의 병영, 보초의 위치, 포대의 정형을 알았다. 적들은 토성을 쌓고 그밖에 철조망을 둘러친 그속에다 병영을 지었는데 거기에는 목재소 경영주놈과 지도관놈의 사택도 있었다. 그리고 그 부근에는 료리집까지 있었다.
밖에서 기다리던 부대에 련락이 되자 모두 은밀히 먼저 우리가 넘어온데로 해서 목재소안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철조망을 끊고 경찰대놈들의 병영으로 접근하다가 료리집에서 경찰대 한놈이 초롱불을 들고 비틀거리며 나오는것을 제껴치운 다음 계속 정문에 접근하였다.
그런데 이때 포대의 적들이 고함을 치더니 사격을 시작했다. 적들의 위치는 높은데고 우리는 낮은곳에 있었다. 공격을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우리가 더욱 불리하게 된다.
우리의 기관총대는 굳게 닫힌 성문 접철부분에 2정의 기관총으로 련발사격을 들이댔다. 접철언저리가 벌둥지처럼 되였을 때 한꺼번에 달려들어 문을 콱 밀치니 적들이 하늘처럼 믿던 대문이 와지끈하고 나떨어졌다. 기관총대는 안으로 들어가며 계속 맹렬한 사격을 가했다. 적들은 어쩔줄을 몰라 쩔쩔매였다. 집중사격으로 포대가 잠잠해졌다. 그런데 잠시후에 지하포대로 빠져들어간 놈들이 사격을 하며 발악을 하였다. 그리하여 발악하는 놈들에게 수류탄묶음을 들씌워 열대여섯놈을 즉사케 하였다. 놈들은 병영에서 지하포대로 통하는 굴을 뚫어놓았던것이다. 후에 안 일이지만 놈들은 얼마나 바빠맞았던지 기관총을 쏘지도 못하고 짚낟가리속에 감추어두었다.
소탕전이 끝난후 우리는 산림경찰대놈들의 사무실에 들어갔다. 잠시후 한 대원이 마루바닥을 제끼더니 커다란 구멍안에 사닥다리가 놓여있는것을 발견했다.
련락병이 사닥다리로 내려가려하니 그밑에서 《꽝!》하고 총소리가 났다. 적들이 숨어있는것이였다. 련락병은 발을 부상당하였다. 놈들의 비밀은페소는 들어가는 구멍뿐이지 나오는 구멍은 없었다. 그속에는 목재소에서 로동자들의 고혈을 빨아먹고있던 일제놈들이 저희들만 살겠다고 숨어있는것을 30여명이나 일망타진하였다.
전투가 끝난후 우리는 굶주린 로동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창고문을 열어놓고 식량과 피복을 마음대로 가져가게 하였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였다.
날이 밝은 다음 우리는 목재소를 떠났는데 많은 로동자들이 로획물자를 지고 부대와 함께 길을 떠났다. 나는 한 젊은 로동자와 함께 오면서 우리는 어떤 군대이며 누구를 위하여 싸운다는것을 자세히 이야기하여주었다. 그러자 그는 일제와 그 주구들에 대하여 참을수 없는 분노를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유격대가 목재소를 치니 얼마나 시원한지 모르겠소. 무치허목재소는 〈철망없는 감옥〉이라오. 한번 들어만오면 다시나가지 못하니까.… 나는 농사를 짓다가 소를 가지고왔는데 빚을 지다나니 회사에 소를 빼앗기고말았수. 정말 생지옥이지요.》하고 이야기하면서 자기도 유격대에서 싸우겠다는것을 말하였다.
우리 부대가 무치허를 떠난후 원쑤들은 비행기까지 띄우며 발악했었다. 그리하여 뒤에서는 추격해오는 적들과 싸우며 퇴각하였다. 산에 깊이 들어갈수록 눈은 허리까지 쳤다. 그러나 많은 로동자들은 계속 짐을 지고 우리를 따라왔다.
무치허전투는 광활한 동북땅의 풍부한 자원을 강도처럼 략탈하며 인민들의 고혈을 마음대로 빨아먹던 일제침략자들에게 복수의 죽음을 주었으며 그해겨울 《동기토벌》에 날뛰던 놈들에게 우리 유격대의 위력을 다시한번 보여주었다.
동시에 이 전투는 억압과 천대를 받으며 기아에서 허덕이던 로동자들에게 우리 유격대가 그들의 리익을 위하여 싸우는 진정한 인민의 무장력이라는것을 더욱 똑똑히 보여주었으며 혁명의 전망에 대한 승리의 신심을 북돋아주었다.
이리하여 각성된 로동자들은 한두명씩 개별적으로 혹은 십여명씩 집단적으로 유격대에 입대하여 우리의 대오는 더욱 강화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조직령도하신 우리 유격대는 항상 이렇듯 인민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는바 바로 여기에 그의 힘의 원천이 있었다. 무치허를 떠난 우리는 다푸르허쪽으로 향하였다.
12. 연집강에서의 개가
조도언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조직령도하신 항일무장투쟁의 나날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이의 가르치심대로만 행동하면 아무리 어려운 일도 능히 해낼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1934년 7월 어느날이였다. 련대지휘부로부터 나에게 통신련락이 왔다. 제3중대본부가 위치하고있는 부암동까지 곧 오라는것이였다. 1중대장이던 나는 대원 2명을 데리고 오전에 출발하여 5도구어귀에서부터 령을 넘어 저녁무렵에야 부암동에 도착하였다.
방에는 벌써 여러 동무들이 모여있었는데 그들은 우리를 기다리는중이였다.
이윽고 련대지휘부에서는 긴요한 문제를 우리들앞에 제기하였다. 그것은 연집강 흥륭툰부락의 자위단놈들을 습격하여 그곳 인민들의 소원을 풀어주며 무기를 획득하자는것이였다.
당시 일본침략자들은 연길시에 있는 《미야다》라는 일제놈에게 책임지워 1934년 봄부터 연집강 흥륭툰부락에 집단부락을 설치하는 토성공사를 시작하였다. 놈들은 주변 18개 부락인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토성을 쌓고있었으며 이를 보장하기 위해 자위단 20여명을 여기에 주둔시키고있었다. 자위단놈들은 무고한 인민들을 야수적으로 략탈, 살해하고있었다. 그래서 이곳 인민들은 우리 유격대들이 하루속히 이 원쑤놈들을 소탕해줄것을 념원하고있었다. 자위단놈들이 가지고있는 무기는 장총이 21정이며 권총이 1정이였다. 권총은 자위단단장놈이 차고있었다.
그놈들을 쳐부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무기를 획득해야 하였다. 나는 대뜸 그놈들을 소탕하는 습격전에 가겠다고 나섰으며 뒤이어 20여명의 동무들이 주먹을 부르쥐며 일어났다. 그리하여 8명으로 조직된 습격조를 책임진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인민들의 소원을 풀어주고 무기를 로획해오겠다는것을 맹세했다.
해가 질무렵 우리 습격조원들은 부암동을 출발했다.
연길강을 따라 동쪽으로 행군하다가 자그마한 령을 하나 넘으니 집이 한채 나타났다. 이 집은 적들에게 학살당한 동지의 가옥인데 6칸으로 되여있었다. 우리는 뒤방에서 쉬면서 정치공작원들을 만나 정형을 들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축성중인 토성북쪽 토담집이 과거 지주집인데 여기에 자위단놈들이 있다는것이였다. 그리고 자위단실 내부구조에 대해서도 세밀히 알려주었다.
우리는 전투계획을 작성하면서 토의하였다. 야간습격을 할것인가? 주간습격을 할것인가?
야간습격을 하자면 놈들이 다락에서 자고있기때문에 무기를 탈취하기가 곤난할것이다. 더우기 놈들은 도처에서 유격대들이 밤에 나타난다는 정보를 매일처럼 듣고있는터이라 특히 야간경계를 강화하고있는것이다. 낮에 습격한다면 일하다가 기습해야 하겠는데 그것 역시 곤난할것이다. …우리는 있을수 있는 모든 정황을 고려하면서 심중히 토의하였다.
드디여 우리는 온갖 곤난을 뚫고 《목숨과 무기를 바꾸자》는 결심으로 낮에 습격하기로 작정했다.
이른아침 나는 방차대 10여명을 데리고 산릉선을 따라 흥륭툰부락 서남쪽고지에 가서 거기에서 멀지 않은곳에 주둔하고있는 위만군 40여명이 진공해오면 그를 차단하라고 하였다.
독립가옥에 돌아온 나는 습격조원들과 함께 지방공작원들이 가져다준 농민복을 갈아입고 삽, 괭이, 보자기 등을 손에 들었다.
목적지인 흥륭툰부락은 연길시(국자가)에서 연길강을 따라 북으로는 25리나 되는 지점에 있는 그리 크지 않은 부락이다. 북으로는 높이 649m 나 되는 뾰족산이 솟아있어 일명 뾰족산앞부락이라고도 부른다. 이 뾰족산이북은 우리 유격근거지이므로 이 부락은 유격구역과 적통치구역의 중간지대에 위치하고있었다. 그리고 이 부락서쪽으로는 연길강이 흐르며 동쪽으로는 연길에서 왕청현 백초구로 통하는 주요자동차도로가 놓여있었다.
우리는 몹시 긴장했으나 그런 기색을 얼굴에 나타내지 말아야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웃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며 걸었다.
그때 부르던 《청춘가》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청청하늘엔 별도나 많고요
인간사회는 잔말도 많구나
창밖에 오는 비는 산란도 하고요
비끝에 돋는 달은 유난도 하구나…
드디여 그 부락에 도착했다. 부락을 둘러싼 토성은 한절반쯤 쌓여졌는데 억수로 내려퍼붓군 하는 장마비에 군데군데 무너져있었다. 우리는 토성서쪽문으로 들어가 부락복판에로 태연스레 걸어갔다. 토성쌓는 일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한창 농민들이 사방에서 모여드는중이였다.
부락복판의 한곳에는 달구지가 놓여있었다. 그것을 본 나는 얼른 거기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내가 달구지우에 올라앉으니 다른 동무들도 하나둘 달구지를 중심으로 멍에에도 걸터앉고 달구지바퀴에 등을 대고 서기도 하고 맨땅에 펄썩 주저앉기도 하였다. 나는 피우고싶지 않은 담배를 말면서 궁리했다. 궁리하면서도 나는 《동무》란 말을 입밖에 내지 말아야 한다는것을 명심했다. 다음순간 나의 눈앞에는 소연길강 줄기를 따라 걸어오면서 목격한 논밭들이 얼른거렸다. 바쁜 농번기에 농민들이 토성축성공사에 매일처럼 끌리여나오기때문에 논밭에는 범이 새끼를 칠 지경으로 풀이 무성했었다. 내가 피우던 담배를 내뿌리며 맞은켠에 앉아있는 정일권동무를 바라보자 그는 나의 곁으로 다가왔다.
보리 벨 고개는 넘어만 가는데 비는 자꾸 오지, 토담은 매일 나와 쌓으라고 하지, 보리는 썩어가지, 우리는 앞으로 뭘 먹고살겠는가, 먹고야 일할게 아닌가, 그러니 우리들이 단장한테 들어가서 빌어보세, 사흘동안만 보리를 베게 해달라고…
정일권동무와 나는 이렇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정일권동무는 곧 계획한대로 농민들을 추동하는 선전사업을 진행하면서 우리 대표를 선출하여 자위단장에게 사정을 하자고 하였다. 그러자 농민들은 적극 찬성하면서 정일권동무에게 대표가 되여달라고 하였다.
농민들이 이렇게 요구하자 그는 요구에 못이기는척하면서 달구지우에서 내려 동무들을 은근히 둘러보며 《길고 짧은것은 대봐야 안다는데 들어가 사정해보자구.》하면서 곧바로 자위단실 있는쪽으로 앞장서걸었다.
자위단실의 토담정문에는 보초놈이 서있었다. 그놈은 잘되여야 20살안팎이였다. 우리는 그놈의 앞에 다가가 갈모자를 벗어 가슴에 착 대고 허리를 구부리면서 《안녕하십니까요?》하고 인사를 했다. 그러자 그놈은 건방진 어조로 《응 뭐냐.》했다. 《다름이아니라 단장님을 좀 만날수 없습니까?》하고 물었다.
《뭣하러 온 사람들이냐?》
《토성을 쌓으러온 사람들이지요.》
보초놈은 우리들의 차림새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만나겠으면 들어가봐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말은 퉁명스럽지만 들어가보라는것이 반가왔다.
계획대로 우리 7명은 점심그릇이며 괭이를 토담곁에 다 놓고들어갔으며 한명은 떨어졌다.
보초를 통과하자 계획한대로 정일권동무는 자위단장실로, 나머지동무들은 자위단병실로 각각 들어갔다.
나는 자위단실 문을 잡아당겼다. 바닥에서 머리를 깎고있던 자위단놈이 흘끔 쳐다보더니 《이 자식아, 왜 군대실에 들어와?》하고 소리치면서 주먹으로 나의 가슴팍 아래쪽을 때렸다. 나의 가슴팍밑에는 권총자루가 있었으므로 나는 몸을 왼쪽으로 날쌔게 비켰다. 그놈은 문을 탕 닫아버렸다. 나는 자위단장실쪽을 돌아다보며 《빨리 들어가서 단장님을 만나보고가자.》고 소리치며 조끼앞을 와락 쥐여당기니 단추들이 떨어져나가며 손에 권총손잡이가 쥐여졌다. 나는 권총을 오른손에 잡아드는 순간 다시금 문을 열어제끼며 《꼼짝말라. 움직이면 쏜다!》하고 고함치면서 머리깎는 자위단놈들의 사이를 막 넘어뛰여 달려들어갔다.
문창우에 걸터앉았던 자위단놈들은 기겁하여 창밖으로 나딩굴어 떨어졌다.
나는 방에 세워놓은 총 열자루를 방 한구석에 모아놓고 형편을 살폈다. 이때 한놈이 총을 쥐려고 문창으로 손을 올려미는것을 발견하자 나는 그놈에게 한방 쏘았다. 그놈은 《악!》소리를 입밖에 내며 창문밑바닥에 거꾸러졌다.
남쪽방을 보니 자위단장실로 갔던 정일권동무가 어느새 와서 자위단놈하고 싸우고있었다. 그 방에 그가 달려들어갔을 때 놈들은 당황하여 문창으로 몸을 피했는데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한놈이 장총을 손에 들고 그에게 육박해왔다. 이 위급한 순간에 정일권동무는 급히 달려들어 그놈의 장총을 두손으로 움켜잡았다. 자위단놈은 온돌방우에 있었고 정일권동무는 바닥에 있었는데 서로 총을 잡고 잡아당기기내기를 하고있었다. 정일권동무는 총을 잡아당기는 자위단놈의 힘을 리용하여 온돌우로 뛰여올라갔다. 올라가자 정일권동무는 그놈을 소처럼 가로타고 돌아갔다. 깔린 그놈은 짐승마냥 씨근덕거리며 정일권동무를 덮치려고 용을 쓰는것이였다. 나는 이쪽방에서 몇번이고 권총을 자위단놈에게 겨누었지만 엎치락뒤치락하기때문에 쏠수 없었다. 이때 장동무와 영창동무가 달려들어왔다. 그리하여 저주로운 자위단놈은 다리를 뻗고야말았다. 토담밖에서는 자위단실에서 총소리가 나자 약속한대로 대기하고있던 동무가 달려들어 보초놈의 무장을 해제하였다. 그리고 자위단장놈은 혼비백산하여 모여들었던 사람들의 틈에 끼여 도망쳐버렸다.
우리는 승리의 기세드높이 정문으로 나왔다. 우리는 장총 20여자루를 걷어가지고나오며 너무도 기뻐서 군중들을 향해 구호를 웨쳤다. 동무들도 따라웨쳤다.
《우리의 적인 일본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자!》, 《우리는 조선사람을 위하여 싸우는 진정한 혁명군이다.》, 《조선독립 만세!》그리고 나는 들끓는 군중들에게 호소했다.
《여러분! 일제놈들의 억압을 박차고 우리와 함께 싸웁시다. 놈들이 멸망할 날은 꼭 오고야맙니다. 토성을 쌓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 혁명을 위하여 싸웁시다!》
군중들은 우리를 환영하며 너무도 기뻐 어쩔줄을 몰라하였다. 나는 좋은김에 입나팔을 불며 다리춤을 추었다.
근처에 둥지를 틀고있는 적들이 밀려들것이라는것을 알고있는 우리는 곧 부락에서 나와 연집강곬을 따라 북으로 향했다.
그때에야 위만군놈들이 우리를 추격하여왔다. 나는 방차대가 있는 곳으로 갔다.
아군은 그놈들을 향해 사격했다. 놈들은 더 접근하지 못하고 퇴각해버렸다.
이리하여 우리는 총 몇방 쏘지 않고 적의 무기 20여정을 로획했으며 인민들의 소원을 풀어주었다.
승리한 우리 습격대가 저녁무렵에 부암동에 도착하니 그곳 아동단원들과 전체 유격근거지내 인민들이 붉은 기발을 흔들면서 우리들을 환영하여주었다.
그때 기쁘고 가슴벅차던 일이 지금도 어제런듯 회상된다. <저작권자 ⓒ 프레스아리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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