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우 황영일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자라기까지
해방이후 남쪽이나 북쪽이나 많은 사람들이 정국의 혼란을 맞이하였다. 친일파로 잘 나가던 인간들은 숨을 곳을 찾아갔고 해방의 주역들은 어깨를 펴고 거리를 활보하였다. 그것도 잠시 분단의 비극이 시작되면서 개개인의 삶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었고 각자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만 했다. 이러한 때에 자의반 타의반 누구는 남으로 누구는 북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 힘들게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을 재조명하고 소개하고자 한다. 북행을 택한 사람들의 관하여 남쪽의 여러 가지 자료에도 소개되었지만 내용이 대부분 짧아 전후 내막을 알기가 어려웠다. 마침 북에서 운영하는 <우리민족끼리>사이트에 당시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북에서 어떻게 정착했고 어떻게 살아갔는지 그나마 자세하게 소개 되었다. 그 자료를 다시 미국에서 운영하는 <재미련> 사이트에 소개된 것을 원문 그대로 소개한다. 북을 택하고 어렵게 올라간 사람들의 행적에 대해 알고자 하는 독자들에 매우 유용한 자료라 생각하며 <프레스아리랑>이 ‘[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영화배우 황영일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자라기까지' 원문을 그대로 소개한다.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자라기까지
∙ 1919년 5월 20일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출생.
∙ 1939년 중국 할빈과 서울의 여러 극단 연극배우로 활동.
∙ 1945년 8. 15이후 서울예술극장 연극배우로 활동.
∙ 1950년 조선인민군에 입대.
∙ 1953년 국립연극극장(당시) 연극배우로 활동.
∙ 1955년 교통성예술극장(당시) 단장으로 사업.
∙ 1966년 조선2. 8예술영화촬영소(당시) 영화배우로 활동.
∙ 1989년 3월 6일 사망.
∙ 인민배우.
영화배우 황영일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불후의 고전적명작 혁명연극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를 각색한 예술영화《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에서 나오는 조선침략의 괴수 이또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생각한다.
사람들은 이 영화를 통하여 갖은 위협과 협잡, 회유기만으로 《을사5조약》을 날조한 이등박문의 가증스러운 몰골을 보면서 치솟는 격분을 금치 못한다.
배우의 연기가 진실할수록 관객들은 영화의 세계에 깊숙이 빠져들게 되며 그 과정에 나름대로 작중인물을 사랑하거나 혹은 증오하기마련이다.
그런 까닭에 철없는 아이들은 물론 산전수전을 겪었다는 어른들도 간혹 길가에서 황영일을 만나면 마치 그가 진짜 이등박문인듯이 랭대하군 하였다.
그때마다 황영일은 그들의 분노가 당연한듯 고개를 수굿하고 걸어가군 하였다.
인민배우 황영일!
사람들은 그가 연기를 진실하고 특색있게 한다고 감탄하였지만 50이 넘은 나이에 참다운 연기형상창조의 첫걸음을 떼였으며 인생말년에 창조의 최전성기를 맞이한 사실에 대하여서는 잘 알지 못한다.
우리는 한때 영화계를 떠나려고 하였던 황영일을 자랑스러운 영화예술인대오에 세워주시고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키워주신 위대한 사랑의 전설을 세상에 전하려고 한다.
갈림길에서
1970년 5월 중순 어느날이였다.
이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군사물영화창작에서 기적을 안아오실 원대한 구상을 안으시고 조선2. 8예술영화촬영소(당시)를 찾으시였다.
오랜 시간에 걸쳐 일군들과 창작가들에게 군사물영화창작과 관련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신 장군님께서는 촬영소의 창작가, 예술인들의 명단을 료해하시다가 배우 황영일의 이름이 없는것을 보시고 그의 이름이 왜 없는가고 물으시였다.
그때 황영일은 지난 기간 연극창조활동을 하면서 저도모르게 몸에 배인 도식적인 틀과 과장된 연기와 같은 신파적인 요소를 없애지 못하여 영화배우로서는 전망이 없는것으로 평가받고있었다. 더구나 출연한 영화도 불과 한두편인데다 맡은 역형상조차 대체로 부정인물인것으로 하여 본인도 영화배우생활을 포기하고 연극부문으로 보내달라고 제기한 상태였다.
촬영소일군으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들으신 장군님께서는 못내 서운해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일군들에게 그 동무는 예술영화 《성장의 길에서》의 매판자본가역도 괜찮게 창조하였다고, 그는 영화배우로서 전망이 있는 동무라고 하시며 배우단에 그냥 있게 하고 영화배우를 시키는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며 그가 가지고있는 배우적재능을 보지 못하고 망탕 처리해서는 안된다고, 그는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될수 있다고 다시금 강조하시였다.
자신에 대한 실망과 장래에 대한 위구로 하루하루를 보내고있던 황영일은 뜻밖에 그 말씀을 전달받자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아, 장군님! 이 몸을 한품에 안아주고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될수 있다고 믿어주신 그 은덕에 무엇으로 보답하면 좋단 말입니까.)
뜨거운 격정속에 그는 지나온 반생을 돌이켜보았다.
1919년 5월, 함경남도 홍원군의 어느 한 농가에서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울려나왔다.
장남이 태여났다는 소식을 듣자 아버지는 써레기담배를 뻐금뻐금 빨다가 이름을 영일이라고 지었다.
해처럼 오래 살라는 뜻이였다.
그러나 악착한 왜놈세상에서 제명을 절반이라도 살면 다행이였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한사코 이름을 영일이라고 지은것은 자기는 황씨문중의 묘지기를 하면서 근근득식하는 촌부이지만 그래도 아들만은 밝은 세상에서 복을 누리며 오래오래 살았으면 하는 소박한 소원때문이였다.
황영일은 머리우에 새벽별을 떠이고 집을 나갔다가 어깨우에 달빛을 얹고 돌아오는 아버지의 거친 손길과 춘하추동 손에 물기가 마를새없이 삯빨래를 하는 어머니의 한숨섞인 애무속에서 자라났다.
각박한 세상은 그가 꼭 부여잡고 다니던 어머니의 포근한 치마자락을 놓아버리기 바쁘게 무거운 호미를 쥐여주었다.
황영일은 아버지를 따라 산에 올라 불을 놓고 죽기내기로 돌과 나무뿌리를 들춰냈다.
10대의 황영일에게는 어른들도 힘들어하는 화전농사가 그야말로 고역이였다.
게다가 생계를 위하여 짬짬이 칡뿌리를 캐고 송기도 벗기였으며 갖가지 나물을 뜯었다.
어느날 지칠대로 지친 황영일은 호미를 집어던졌다.
《아버지, 다른 애들은 학교에 가는데 난 왜 땅을 뚜져야 하나요?》
당돌한 그 물음에 아버지는 자식을 물끄러미 보다가 수걱수걱 밭김을 매였다.
속이 내려가지 않은 황영일은 그 대답을 찾으려는듯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하지만 보이는것은 크고작은 산들과 이따금 숨넘어가는 소리를 지르며 풀숲으로 날아드는 한가한 꿩들뿐이였다.
하기야 아무리 령험한 산신령이라고 한들 망국의 운명이 강요한 그 고달픈 인생을 무엇으로 설명한단 말인가.
《얘, 그러다 해가 질라.》
황영일은 아버지의 꾸중에 입을 나팔주둥이처럼 내밀고 마지못해 호미를 잡았다. 그리고는 작은 가슴에 넘치는 울분을 토하듯 땅에 호미날을 박고 와락와락 긁어댔다.
온종일 허리가 휘도록 부대기를 일구고 곤죽이 되여 집으로 내려온 그가 몸을 대충 씻고 노전바닥에 웅크리고 앉으면 멀건 강냉이죽이 차례졌다.
열그릇, 스무그릇을 먹어치워도 성차지 않는 그 한사발의 강냉이죽에 아버지와 어머니, 누이가 아낌없이 덜어주는 죽을 합쳐가지고 단숨에 마셔버린 황영일은 인차 곯아떨어졌다.
그속에서도 그는 한문과 신학문을 배우는 서당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눈치빠르고 재간좋은 그는 붓글씨를 아주 잘 썼다.
그래서 한집두집 립춘글(옛날 립춘날에 집대문이나 기둥에 써붙이는 글)을 써주기 시작하였는데 그 소문이 온 면에 퍼져 수백호의 립춘글을 써주느라 쩔쩔매군 하였다.
동네사람들속에서는 이런 말이 나돌았다.
《저놈은 결코 촌에서 썩을 놈이 아니요.》
《혹시 우리 동네에서 인물이 나올지 알겠소?》
총각애는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달이 가고 해가 바뀌여도 그치지 않는 기분좋은 칭찬은 그에게 엉뚱한 꿈을 심어주었다.
(그래, 난 도회지에 나가 큰일을 해야 할 사람이다!)
그때부터 황영일의 가슴에는 도시에 대한 동경의 싹이 움트기 시작하였다.
날이 갈수록 사춘기소년에게는 쉬지근한 두엄냄새와 언제부터 나있는지 모르는 우불구불한 소로길을 따라 속절없이 굴러가는 소달구지가 역겨워났다.
공상에 잠긴 두눈에는 대도로를 따라 씽씽 달린다는 물매미같은 승용차며 전기불이 환히 비친다는 도회지의 눈부신 전경이 별천지마냥 안겨왔다.
다 자란 매는 가난하고 우매한 생활의 조롱을 박차고 문명의 창공을 향해 날아오를 기회를 노리고있었다.
그 시각은 평범한 날처럼 례사롭게 닥쳐왔다.
어느해 1월초였다.
그날 황영일의 아버지는 먼곳에 일을 하러 떠났고 어머니와 누이도 남의 집에 일손을 도와주러 가고 없었다.
강냉이이삭들을 부엌아궁이에 집어넣고 슬슬 굴리던 황영일은 주위가 조용해지자 별안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순간 그의 두눈에서 섬광같은것이 번쩍 빛났다.
(이때다!)
자리를 차고 일어난 황영일은 집안의 유일한 재산인 낡은 장농속에 손을 찔러넣었다.
손에 아버지가 건사해둔 갑계(나이가 같은 사람들끼리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무은 계)자금이 든 헝겊주머니가 쥐여졌다.
후들거리는 손으로 세여보니 145전이였다.
많다고는 할수 없지만 세상물정을 모르는 17살 난 총각이 모험을 하기에는 충분한 돈이였다.
돈주머니를 품속에 간수한 황영일은 태를 묻고 자란 생가-가난과 굶주림을 숙명처럼 가져다준 농가에서 뛰쳐나와 눈보라속으로 주저없이 몸을 던졌다. 만약 그 결단이 없었더라면 황영일은 평생 손에서 호미를 놓지 못하고 밭을 뚜지는 부지런한 촌부로 살았을것이다.
후날 황영일은 그때의 일이 가슴에 걸려 고향을 찾아갔었다. 그때 아버지는 이미 세상에 없었다. 대신 마을뒤산에 있는 낯설은 봉분이 그를 기다리고있었다. 황영일은 아들의 속죄를 영원히 받아줄수 없는 아버지를 목놓아 부르며 눈물을 흘렸었다.
하지만 지금의 황영일은 갑계금을 품속에 간직한채 자기의 꿈을 향하여, 도회지를 향하여 씩씩하게 걸어가고있었다.
생활은 그가 립춘글을 써주면서 공상속에 그려보던것처럼 랑만적인것이 아니였다.
이틀도 못 가서 돈주머니가 텅 비여버렸다.
제일 급한것은 이미전부터 쓰려나기 시작한 위주머니를 달래는것이였다.
누구도 가난한 총각에게 호떡 한개라도 그저 집어주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죽지 말고 살아야 한다. 그래야 큰사람이 될수 있다!)
이런 결심을 곱씹느라면 지금의 고생은 별치않은듯이 생각되였다.
그렇게 전전긍긍하던중 다부진 체격의 덕에 홍원군의 어느 한 국수집 화부로 들어갔다.
그 국수집은 중학교옆에 있었는데 앞길로 자기또래 학생들이 보란듯이 머리를 쳐들고 다녔다.
석탄덩이와 다름없이 까만 얼굴을 수굿한 황영일은 곁눈질로 그들을 바라보군 하였다.
가슴속에서 향학열이 다시금 타올랐다.
(나도 공부를 하자!)
황영일은 이웃에 사는 중학생에게 교과서를 부탁하였다.
《화부인 주제에… 넌 한평생 불이나 때는게 좋을거다.》
중학생은 석탄가루가 묻을가봐 멀찌감치 서서 소년화부를 놀려주었다.
황영일은 물러서지 않고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다음날… 또 다음날…
종시 두손을 든 중학생은 영문을 모르겠다는듯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낡은 교과서들을 황영일의 발치에 던져주었다.
그는 속이 불끈거렸다.
(공부를 못하면 말았지 이런 모욕을 참는단 말인가!)
생각 같아서는 당장 그 중학생을 보기 좋게 멨다꽂고싶었다.
불현듯 동네좌상로인이 옛말삼아 들려준 조선봉건왕조시기의 이름난 기술자 장영실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 관가노비의 아들로 태여난 그는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고 자랐다.
세상에 나올 때부터 천한 신분을 숙명으로 타고난 장영실은 동네아이들의 버림을 받은 외로운 아이였다. 그는 늘 혼자서 개울에 나가 물고기를 잡기도 하고 장난감들을 만들며 하루하루를 보내군 하였다. 장영실은 어떤 물건이든지 그저 스치는 일이 없었으며 한번 손에 넣기만 하면 뜯어보고 리해가 되여야만 내놓았다.
장영실은 10살때 관가노비로 되였다.
으리으리한 관가의 대문을 넘어서던 날 어린 소년은 더는 바깥세상구경을 못한다는것을 깨닫자 소리내여 울었다.
그러나 주먹으로 눈굽을 훔치는 작은 가슴은 차돌처럼 단단했다.
(내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대문을 다시 넘으리라!)
그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기술자였다.
장영실의 손이 가닿으면 못쓰게 되였던 농기구들과 무기창고에 수북이 쌓여있던 고장난 무기들이 새것처럼 고쳐졌다. 또한 수레와 배를 뭇는 일에서까지 그가 나서지 않으면 안되였으니 점차 관가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되였다.
어느날 현감이 그를 불러 칭찬하며 소원이 무엇인가고 물었다.
《어머니를 한번 뵙고싶소이다.》
하여 장영실은 관노는 죽을 때까지 가족을 만날수 없다는 관가의 법을 깨뜨리고 10살때 헤여진 후 그처럼 그립던 어머니와 만나게 되였다.
그때부터 그의 가슴속에는 노비의 멍에를 벗어버릴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
어느해 왕가물이 들었을 때 장영실은 현감에게 일러 산골짜기의 물을 끌어다 논밭에 댈 대담한 안을 내놓아 현내의 적지 않은 논밭들을 가물피해로부터 벗어나게 하였다.
그 소문을 들은 세종왕은 관청노비를 등용시키는데 대하여 여러 대신들이 반대하였지만 장영실을 상의원 별좌 (왕의 의복류들과 궁중의 일용품을 대주는 일을 맡아보는 관리)로 등용하였다.
마침내 그는 울면서 넘어섰던 관가의 대문을 웃으며 넘어서게 되였다.
그후 장영실은 자동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었고 50고개에는 내린 비량을 측정하는 세계최초의 측우기를 만들어 세종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
물론 당대의 뛰여난 기술자와 석탄이나 주무르는 국수집 화부를 대비한다는것은 얼토당토않은 일이였다.
하지만 황영일에게 힘과 고무를 준것은 비록 천한 노비였지만 자기의 운명에 도전한 장영실의 장한 기개였다. 그렇다. 서푼짜리 자존심보다 더 귀중한것은 래일에 대한 희망이다. 그것만 있으면, 큰사람이 될수만 있다면 이런 모욕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군말없이 교과서들을 모아가지고 돌아온 황영일은 자습을 시작하였다.
공부시간은 따로 없었다. 헐치 않은 화부일의 쉴참이 그 시간이였고 찬물을 뒤집어쓰며 잠을 덜어 얻어내는 시간이 곧 공부시간이였다.
어찌나 자습에 열중하였던지 어떤 날은 석탄불이 죽은줄도 모르고 교과서에 매달려있다가 하마트면 국수집에서 쫓겨날번 하였다.
교과서를 독파한 황영일의 눈길은 길거리에 있는 책방으로 향했다.
그 책방은 더 많은 지식을 한꺼번에 습득할수 있는 편리한 곳이였다.
그는 몇푼 안되는 월급을 타면 주린 배를 맹물로 달래고나서 책방으로 뛰여가군 하였다.
그 과정에 마음씨 고운 책방주인의 동정을 사게 되였고 그의 소개로 한 극작가를 알게 되였다.
이때부터 그의 인생은 문학이라는 새로운 오솔길에 들어서게 되였다.
쉐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쥴리에트》, 《햄리트》, 《오쎌로》, 쉴레르의 《오를레앙의 처녀》, 《윌헬름 텔》 등은 그가 화부로동의 고달픔도 잊고 밤을 새워가며 읽고 또 읽은 희곡들이였다.
문학의 세계는 신비하고 감미로웠으며 황영일은 때로 자신을 오쎌로나 윌헬름 텔과 같은 사나이로 착각하군 하였다.
다음해인 1937년 11월 그는 1년나마 잡고있던 탄삽을 미련없이 내던지고 그동안에 사귄 작가들을 따라 서울로 갔다.
도중에 평양에 들린 황영일은 그곳에서 작가 김사량을 만났다.
당시 김사량은 첫 단편소설 《토성랑》(1936년)을 발표한 후 문단의 주목을 받고있던 재능있는 작가였다.
그는 황영일에게 우선 직장을 구하고 습작도 하면서 문학공부를 하라고 고무해주었다.
그후 황영일은 어느 한 료리점에서 그릇닦는 일을 하며 그곳에 찾아오는 예술인들과 사귀게 되였다.
그들은 식민지조선에서는 연극을 할수 없으니 만주에 가서 연극활동을 하자고 열에 떠서 이야기하였다.
황영일은 김사량을 찾아갔다.
《만주에? … 그 주장이 옳은것 같소.》
김사량의 말이였다.
《그래, 영일군은 어떻게 할 생각이요?》
황영일은 정색해서 대답하였다.
《전 선생님이 하라는대로 하겠습니다.》
《음, 난 군이 그들과 같이 가는게 좋을것 같소.》
김사량의 지지를 받은 황영일은 1939년 7월 중국의 할빈으로 건너가 연극배우 한진섭과 미술가 김용환, 작가 엄시우, 서만일 등을 중심으로 하여 극단 금강을 설립하였다.
그때의 극단이라는것은 그 어마어마한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한명의 작가와 한명의 연출가, 서너명의 배우로 이루어진 자그마한 단체에 불과하였는데 황영일은 극단배우가 되였다.
이것은 운명의 극적인 전환이였다. 다시말하면 한때 국수집 화부였던 한미한 사나이가 일약 연극배우로 된것이였다.
황영일은 비밀독서회사건으로 체포령을 받고 류랑극단 금희좌에 피신한것이 계기가 되여 연극배우가 되였다는 한진섭의 방조를 받으며 연기훈련을 하였고 무대에 출연하였다.
그러나 극단은 인차 막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만성적인 경영난으로 하여 극단성원들이 사분오렬되였던것이다.
한진섭은 조선으로 또 누구는 일본으로 뿔뿔이 헤여졌다.
황영일은 선배인 한진섭을 따라나섰다.
다시 서울에 나온 황영일은 극단 황금좌에 부연출로 들어갔다가 박학 등이 있는 극단 태양으로 옮겨갔다.
그무렵 그의 인생에서는 또 하나의 변화가 일어났다.
해방을 몇달 앞두고 같은 극단의 얌전한 녀배우와 가정을 이룬것이였다.
차천명이라는 그 녀자는 춘천태생이였는데 14살때 가난한 집살림에 보탬을 주기 위해 친척의 소개로 극단 청춘좌에 들어왔고 여러 극단으로 자리를 옮기다가 이곳 극단에서 자기보다 7년이나 우인 황영일을 알게 되여 그와 일생을 같이하기로 마음먹은것이다.
사립학교 교원들이였던 부모의 좋은 교양을 받으며 자란 차천명은 살림은 가난하였지만 마음만은 빈곤하지 않은 녀성이였다.
그는 가정이라는 보금자리보다 연극에 온넋이 빠져 정신없이 돌아가는 남편을 십분 리해하였고 려염집녀인들이 대개 그러하듯 귀여운 아이들을 낳아 키우며 자기의 가냘픈 어깨우에 마구 쏟아지는 부담을 말없이 이겨나갔다.
1945년 8월 15일, 드디여 나라가 해방되였다.
(아, 얼마나 기다리던 해방인가. 이제부터 새 조선의 연극을 마음껏 하게 되였구나!)
황영일은 뜻이 맞는 연극인들과 함께 서울예술극장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조령출과 박학 등과 새로운 연극을 준비하였다.
《새 조선의 연극을 하자!》
이것은 진보적연극인들의 한결같은 소망이였고 지향이였다.
그러나 철갑모를 쓰고 투박한 군화를 저벅거리는 미군병사들이 남조선을 강점하자 그 꿈은 물거품처럼 되고말았다.
어느날 새로 창작한 연극을 상영하려는데 곤봉을 든 미군헌병이 불쑥 나타났다.
《중지!》
황영일은 한발 나서며 물었다.
《왜 중지하라는거요?》
미군헌병은 한마디 설명도 없이 곤봉으로 황영일의 가슴을 쿡 찔렀다.
《까뗌!》
그자가 손짓하자 뒤에 서있던 깡패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배우들을 치고 차더니 소도구와 무대장치물들을 사정없이 짓부셨다.
황영일은 억이 막혔다.
(제 나라에서 연극도 마음대로 못한단 말인가. 하다면 이 땅은 과연 누구의 땅이란 말인가?)
그 질문에 대답을 주기라도 하듯 《헤이, 헤이!》 하고 징그럽게 웃고있는 미군헌병의 몰골이 어지럽게 안겨왔다.
허탈감에 빠진 황영일은 집에 돌아오자 이불을 뒤집어썼다.
며칠후 겁에 질려 뛰여온 안해가 진보적인 연극인들에 대한 체포소동이 벌어지고있다고 알려주었다.
(음!-)
비로소 황영일은 미국이 《해방자》가 아니라 왜놈을 대신한 침략자이라는것, 외세가 틀고앉은 남조선에서는 새 조선의 연극을 할수 없다는것을 통절히 깨달았다.
격분으로 몸을 떨던 그는 거리로 뛰쳐나갔다.
동료들도 그의 뒤를 따라 진보적인 연극의 합법화를 위한 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그 결과로 차례진것은 감옥행과 은둔생활이였다.
1949년 6월 황영일은 경상북도 대구에 진보적인 극단을 조직하려고 내려갔다가 경찰에 체포되여 서울로 압송되였다.
악착한 원쑤들은 임신중인 그의 안해도 붙잡아갔다.
감옥에 갇힌 황영일은 주먹으로 철창을 힘껏 두드렸다.
(아, 언제면 이 땅에 밝은 빛이 비쳐들겠는가?)
그의 감방에는 북에 갔다온 《죄》로 붙잡힌 한사람이 있었는데 어느날 그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해방후 평양은 새 조선 연극창조의 중심지로 되였다.
극장들에서는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을 형상한《조선빨찌산》, 《뢰성》, 《백두산》 등과 해방후 토지개혁을 통하여 땅의 주인으로 된 농민들을 형상한 《바우》, 《비룡리농민들》, 《성장》을 비롯한 연극들이 성황리에 공연되고있다. 또한 《리순신장군》, 《심청전》, 《춘향전》 등 력사물주제의 연극들도 창조공연되고있다.
진정으로 연극을 하려면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 북으로 가라. …
황영일은 눈앞에 한줄기 밝은 빛이 비쳐드는것을 느꼈다.
그것은 새 조선의 연극활동이 힘차게 펼쳐지는 공화국의 현실이였다.
(언제면 나도 그 품에 안길수 있단 말인가?)
몇달 지나 감옥에서 놓여나온 그는 반동적인 연극단체에 출두하라는 우익깡패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고 두문불출하였다.
1950년 6월 28일 아침, 미제와 리승만도당의 무력침공을 단호히 물리치고 서울을 해방한 인민군대가 보무당당히 나타났다.
《김일성장군 만세!》
《인민군대 만세!》
황황히 이불을 차던진 황영일은 미처 옷소매도 꿰지 못한채 거리로 달려나갔다.
그의 눈에 처음으로 보는 군대의 모습이 안겨왔다.
하나같이 름름한 인민군병사들은 굳게 닫겼던 극장문들을 활짝 열었다.
황영일과 동료들은 눈앞의 현실이 믿어지지 않아 주춤거렸다.
그때 인민군 군관이 기연가미연가하는 그들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었다.
《여러분, 인민의 세상이 왔습니다. 그러니 연극을 마음껏 하십시오.》
전쟁의 포성이 멀리 남쪽에서 울려오던 8월 중순 황영일은 군복을 입고 조선인민군예술극장 배우로 입대하였다.
언제 한번 남편과 뜻을 달리해본적 없는 안해도 그를 따라나섰다.
이 시기 연극작품들은 전쟁환경에 맞게 소편대기동공연에 맞는 단막극을 기본으로 하면서 중장막형식을 배합하였으며 그 주제사상적내용에서 군사물이 앞서고 후방인민들의 생활을 반영한것이 결합되였다.
9월 중순 뜻밖에 전략적인 일시적후퇴가 시작되였다.
황영일부부는 서울에 장모와 두 아들을 남겨두고 북행길에 올랐다.
안해는 눈굽을 훔치며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황영일도 마음 같아서는 집에 들리고싶었다.
하지만 촉박한 시간으로 하여 그렇게 할수 없었다.
후퇴대렬을 따라가면 애국이요, 떨어지면 반역이였다.
황영일은 차마 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안해의 손을 꽉 잡고 걸음을 다그쳤다.
이듬해 인민군대를 따라 북으로 들어온 장모가 그들을 찾아왔다.
《어이구, 이 일을 어쩌면 좋나. 글쎄 그놈들이 애들을…》
알고보니 그는 적들에게 체포되여 《빨갱이장모》라고 악착한 고문을 받다가 간신히 놓여나왔는데 그동안 죄없는 두 아들은 무참히 학살되였던것이다.
황영일은 입술을 피나게 깨물었다.
(이 원쑤놈들아, 그 어린것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그는 가슴속에서 화산처럼 끓고있는 분노를 연기형상에 쏟아부었다.
조선사람들의 가슴에 수백년을 두고도 아물지 못할 아픈 상처를 남긴 3년간의 전쟁은 공화국의 승리로 끝났다.
그무렵 황영일은 국립연극극장(당시)에 소환되였고 그후 교통성예술극장(당시) 단장으로 임명되여 십여년동안 사업하였다.
1966년 6월 황영일은 조선2. 8예술영화촬영소(당시) 배우로 조동되였다.
연극배우로부터 영화배우로 방향을 전환한 그의 가슴은 세차게 높뛰였다.
섭섭한것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맡은 역이 전부 부정인물이라는 사실이였다.
황영일은 내색하지 않고 역인물형상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 바쳤다.
그렇지만 날이 갈수록 자신에 대한 자신심이 사라져갔다.
설상가상으로 동료들속에서 황영일이 나이도 많고 전망이 없다는 소문이 쉬쉬하며 돌아갔다.
황영일은 인생에도 황혼이 있다는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여 고민끝에 연극부문으로 보내달라고 제기하였던것이다. …
그런데 문학예술의 영재이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사람들의 기억속에 사라져가는 한 배우의 재능을 알아보시고 이미 50고개에 이른 황영일에게 이렇듯 크나큰 사랑과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던것이다.
정녕 장군님은 은막우에서 사라질번 하였던 그를 자애로운 한품에 안고 손잡아 이끌어주신 위대한 어버이이시였다.
그러나 황영일은 따사로운 그 손길이 오늘만이 아니라 래일에도 영원히 자기의 운명을 지켜주고 보살펴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위대한 스승과 관록있는 제자
위대한 장군님의 은정어린 조치로 조선2. 8예술영화촬영소에서 계속 배우생활을 하게 된 그날부터 황영일의 가슴속에는 한가지 소원이 소중히 자리잡았다.
그것은 먼발치에서라도 장군님을 한번 만나뵈웠으면 하는것이였다.
그이를 뵈오면 허리를 열백번 굽혀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싶었다.
가끔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혹시 렴치없는 인간이 아닐가. 사실 영화배우치고 나처럼 크나큰 사랑을 받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그처럼 바쁘신 장군님을 만나뵙겠다고 욕심을 내다니…)
아마도 말타면 경마잡히고싶다는 속담은 자기를 두고 생겨난 말 같았다.
그는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심정을 가까스로 다잡고 맡은 역인물에 대한 연기형상을 무르익혀나갔다.
그러던 1970년 9월 중순 어느날이였다.
그날 밤 황영일은 신기한 꿈을 꾸었다.
꿈에서 위대한 장군님을 만나뵙고 감사의 인사를 올렸던것이다.
흥분한 그는 안해에게 꿈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에구, 당신두 참…》
한심하다는듯 혀를 끌끌 차는 안해를 보자 황영일은 아쉬운 마음을 금할수 없었다.
꿈과 현실은 반대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그런데 바로 그 소원을 이루게 될줄을 어찌 알았으랴.
다음날 예술영화 《36호의 보고》의 창조과정을 지도하시기 위해 나오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일군들과 창작가들을 만나주시다가 문득 황영일을 알아보시고 《아, 황동무도 왔구만.》라고 하시며 반갑게 손잡아주시였다.
꿈인가 생시인가 하여 손등을 꼬집어본 황영일은 뒤늦게야 정신을 차리고 그이께 삼가 인사를 올리였다.
장군님께서는 미소를 지으시며 이번에도 부정인물인 천대산대장역을 맡아하지 않았는가고 다정하게 물으시였다.
황영일은 자신없는 목소리로 그렇다고 말씀드렸다.
천리혜안의 예지를 지니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 한마디 대답에서 황영일을 비롯한 일부 배우들속에 남아있는 옳지 못한 창작태도를 꿰뚫어보시였다.
하지만 장군님의 높은 뜻을 알수 없었던 황영일은 영화에서 부정역형상을 수행하는데 대하여 그리 달가와하지 않았고 아무런 긍지도 가지고있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예술영화 《36호의 보고》에서도 부정역인 천대산비적대장역에 대한 깊은 연구없이 겉발림식의 역형상을 창조하였던것이다.
그날 장군님께서는 귀중한 시간을 내시여 황영일의 그릇된 창작태도를 하나하나 바로잡아주시였다.
황영일은 비로소 자신의 연기가 그이의 숭고한 미학사상과 비해볼 때 얼마나 뒤떨어져있는가를 깊이 느끼게 되였다.
그는 즉시 새로운 연기안을 세우고 진실한 형상을 창조하는데 달라붙었다.
이렇게 되여 황영일은 불과 얼마 안되는 장면이지만 아주 교활하고 음흉하기 그지없는 비적대장역인물의 내면세계를 창조하는데 성공할수 있었다.
1970년 9월 하순 어느날 예술영화 《36호의 보고》수정작업필림을 보아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황영일동무가 연기를 확실히 잘합니다.》라고 높이 평가해주시였으며 1977년 12월말 예술영화 《보이지 않는 요새》의 두개 필림을 보시였을 때에도 황영일동무가 연기를 잘한다고 거듭 치하해주시였다.
그때부터 황영일은 장군님을 위대한 스승으로 모시고 연기창조에 모든 열정을 다하였다.
하지만 그가 그이께서 밝혀주신 주체적배우연기리론의 높은 경지를 깨닫자면 아직 많은 기일이 걸려야 하였다.
1973년 10월 어느날 장군님께서는 어느 한 촬영현장을 찾아주시였다.
배우들의 연기형상과 관련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던 그이께서는 배우들이 출연할 때에는 역인물들이 입는 옷을 그대로 입어야 한다고 일깨워주시였다.
황영일은 머리를 들수 없었다.
장군님께서는 잘못을 뉘우치는 그에게 부정인물형상에서 지침으로 될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이께서는 누가 자본가를 형상하는가 하는데 따라 형상목적각도가 달라진다고 하시며 우리 배우들과 부르죠아사회에서 돈에 매인 연기자사이에는 자본가들의 생활을 그리는 목적도 다르고 각도도 다르다, 우리 배우들은 자본가들의 썩어빠진 몰골을 그대로 형상하여야 한다, 배우들은 이러한 요구를 똑똑히 알고 연기를 하여야 한다고 이르시였다.
그러시고는 배우들이 배역을 맡아가지고 형상단계에 들어가면 그 역인물들의 세계에서 생활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부정인물들의 생활세계에 아무리 깊이 끌려들어간다고 하여도 사상체계가 바로서면 일없다고 가르치시였다.
황영일은 장군님의 교시를 자자구구 따져가며 자신을 더 깊이 돌이켜보았다.
(나는 하필 사람들의 증오를 받는 부정역만 맡아해야 하는가고 좋지 않게 여기고 그것을 수치스러운 일로 생각해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장군님께서는 그러한 나를 깨우쳐주시였다.
아, 위대한 스승!
세상에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제자는 없다.
그렇다. 이제부터라도 부정역인물에 대한 그릇된 태도를 완전히 고쳐야 한다. 완전히!)
그날에 주신 장군님의 교시는 후날 황영일을 인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자라날수 있게 한 귀중한 지침이였다.
뭐니뭐니해도 그가 크게 성공한 역인물형상은 예술영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에서 이등박문의 역이였다.
이 역을 분담할 때 창조집단에서는 론의가 많았다.
그러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황영일에게 예술영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에서 이등박문의 역을 대담하게 맡겨주시고 그 창조과정을 현명하게 이끌어주시였다.
장군님께서 친히 보아주신 연출대본을 받아안던 날 황영일은 흥분으로 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그는 장군님의 믿음에 어떻게 하면 보답할것인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다.
다음날부터 황영일은 이등박문의 자료를 수집하였고 역인물의 성격에 맞는 말투와 행동을 수록한 수십페지에 달하는 연기안을 만들었다.
그러나 탐구를 거듭하여도 좀처럼 형상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우선 인물성격의 외적표현인 분장에서부터 애로가 제기되였다.
창작가들과 마주앉아 토론을 거듭하였지만 누구 하나 신통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였다.
눈앞이 캄캄하였다.
지금껏 예술영화 《성장의 길에서》, 《북극성》, 《36호의 보고》를 비롯하여 여러 영화들에서 부정역을 맡아하였지만 이번처럼 난감하기는 처음이였다.
(과연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
안타까움속에 촬영날자는 하루하루 다가왔다.
고심끝에 황영일은 이등박문의 수염을 많이 붙이는것으로 분장을 완성하였다.
그가 분장을 하고 나타나자 창작가들은 역인물과 비슷하다고 하면서 그대로 촬영하자고 하였다.
그때로부터 몇달이 지난 1978년 12월 어느날이였다.
이날 촬영현장에 찾아오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예술영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의 창작과정에 나타난 부족점들을 친히 하나하나 바로잡아주시며 이등박문의 분장을 보자고 황영일을 부르시였다.
그가 장군님께서 계시는 방으로 들어서자 그이께서는 호탕하게 웃으시며 분장을 해서 몰라보겠다고, 가까이 오라고 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그의 분장과 의상을 하나하나 주의깊게 살펴보시였다.
그러시던 그이께서는 그 무엇인가 기억을 더듬으시는듯 깊은 생각에 잠기시였다.
이윽고 그이께서는 이등박문의 분장이 잘 안되였다고, 황영일이 분장한 수염이 그놈의 수염보다 숱이 지나치게 많다고 일깨워주시였다.
황영일은 죄스러웠다.
사실 그것은 이등박문의 사진을 본 표상을 더듬으면서 품을 들여 만든 수염이였다.
그를 바라보시던 장군님께서는 예술영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는 력사적사실을 형상한 예술영화이기때문에 그 시대의 인물들을 가식없이 생동하게 그려야 한다고, 그러자면 분장을 잘하여 분장을 한 인상을 주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고 하시며 력사물영화에서는 인간이 자연스러운 얼굴을 가지고 등장할수 있도록 분장형상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가르치시였다.
배우자신도 미처 알지 못하였던 결함을 한순간에 포착하시고 배우는 마땅히 분장의 세부에 이르기까지 놓쳐서는 안된다는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는 장군님을 우러르며 황영일은 위대한 스승의 가르치심을 받는 자기야말로 이세상 그 어느 배우도 지닐수 없는 크나큰 행복을 안고 사는 영화배우라는것을 다시금 느끼였다.
장군님께서 촬영현장을 다녀가신 후 수많은 당대의 력사자료들과 사진자료들이 도착하였다.
황영일은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그 자료들을 가지고 력사적사실에 어울리게 이등박문의 수염을 다시 붙였으며 끝끝내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의 분장을 완성할수 있었다.
다음해 3월 3일이였다.
그날 야외촬영장에서는 초대조선통감 이등박문이 서울 남대문거리로 입성하는 장면을 촬영하고있었다.
이등박문으로 분장한 황영일은 사륜마차에 올랐다.
이윽고 네필의 말이 끄는 마차가 남대문을 향하여 서서히 굴러가기 시작하였다.
황영일은 매국배족의 무리들의 미친듯 한 부르짖음에 흰 장갑을 낀 손을 들어 답례하였다.
무심결에 촬영기쪽을 보던 그는 가슴이 뭉클하였다.
글쎄 위대한 장군님께서 촬영기구도경을 들여다보고 계실줄을 어찌 알았으랴.
나라의 전반사업을 돌보시느라 분망하신 그이께서 귀중한 시간을 내여 창조과정을 지도해주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던 그였다.
다음순간 자신의 미숙한 연기로 하여 그이께 걱정을 끼쳐드리지 않았는가 하는 초조감이 뒤따랐다.
그는 가슴을 조이며 소식을 기다렸다.
얼마후 위대한 장군님께서 이등박문의 분장이 잘되였다고, 이등박문의 역을 잘했다는 과분한 치하의 말씀을 주시였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황영일은 그만 목이 꽉 메였다.
(내가 놓친 이등박문의 분장은 물론 연기형상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를 깨우쳐주신분은 위대한 장군님이시다. 그이가 아니시라면 어찌 오늘을 생각할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그이께서는 모든 성과를 나에게 돌려주시니 이 심정을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하는가.
그렇다. 극도로 오만하고 교활하기 그지없는 침략괴수의 몰골에 민족의 피가 저절로 끓게 하는 인상깊은 연기형상, 참으로 그것은 한편의 영화를 통해서도 시대와 력사의 진모가 심오히 밝혀지도록 현명하게 이끌어주신 장군님의 탁월한 령도가 낳은 명화폭이다!)
예술영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가 세상에 나오자 폭풍같은 반향이 일어났다. 특히 이등박문의 역을 형상한 황영일은 일약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그러던 1979년 4월 어느날이였다.
이날 황영일은 뜻밖에 위대한 장군님을 만나뵙게 되였다.
그이께서는 황영일에게 인민배우의 명예칭호가 수여된 소식을 친히 알려주시며 《축하합니다. 늙지 말고 계속 좋은 형상을 창조하시오.》라고 뜨겁게 고무해주시였다.
그로부터 한해가 지난 1980년 5월 한 일군이 황영일을 찾았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하며 일군의 뒤를 따라 어느 한 방에 들어서던 황영일은 우뚝 굳어졌다.
눈앞에 희한한 생일상이 차려져있었던것이다.
그는 해당 일군을 통하여 장군님께서 자기의 60돐생일상을 차려주도록 하신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였다.
원래 그의 60돐생일은 이미 지나갔었다.
한해전에 아들, 며느리들은 그의 생일상을 차리겠다고 떨쳐나섰지만 황영일은 절대로 차리지 못하게 하였었다.
사실 예술영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에서 이등박문연기를 잘하였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위대한장군님께서 하나하나 이끌어주시였기때문이다. 그런데 무슨 큰일이나 했다고 생일상을 차리는가?
그가 얼마나 엄하게 말렸는지 자식들은 생일상을 차릴 엄두를 내지 못하였었다.
그런데 장군님께서 그에게 이처럼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신것이였다.
감격에 목이 멘 그의 눈앞으로 지나온 나날들이 눈굽을 적시며 안겨왔다.
청산벌에 농촌지원을 나갔을 때 자기의 머리에 감긴 붕대를 보시고 몹시 다쳤는가고 걱정하시는 장군님앞에서 어깨를 떨며 흐느껴울던 일, 예술영화 《우리 동무들》의 작업필림을 보시다가 화면에 비쳐진 자기의 얼굴을 보시고 머리가 다 나았는가고 하시며 보내주신 귀한 약을 받아안고 어쩔바를 몰라하던 일, 어버이수령님의 존함이 모셔진 손목시계를 받아안고 그 사랑에 높은 실력으로 보답하리라 굳게 마음다지던 일…
그가 손수건으로 눈굽을 훔치는데 항일의 로투사가 다가와 늙지 말고 좋은 영화를 더 많이 만들라고 하신 장군님의 교시를 전달해주는것이였다.
순간 황영일은 참고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았다.
(아, 장군님! 한때 영화계를 떠나려고 하였던 저를 한품에 안아주시고 관록있는 인민배우로 내세워주신것만도 분에 넘치는데 오늘은 또 생일상을 차려주시고 고무의 말씀까지 안겨주시니 이 사랑, 이 은정을 무슨 말로 다 전해야 합니까!)
그때 그는 60고개를 넘어서고있었다.
인생의 황혼기라고 할수 있는 나이였다.
그러나 황영일은 위대한 스승께서 안겨주신 크나큰 믿음과 청춘의 열정으로 예술영화 《전초선》, 《첫 보안서원들》, 《새 정권의 탄생》을 비롯한 여러편의 예술영화들에서 다양한 인물형상을 특색있게 창조하였다.
노력과 열매
황영일은 팔짱을 끼고 과일나무에서 무르익은 열매가 저절로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였다.
풍요로운 가을날 느슨한 웃음을 지은채 봄내 여름내 땀을 철철 흘리며 가꾼 나무에서 빨갛게 익은 사과를 수확하는 성실한 인간이였다.
《열매란 제손으로 가꾸고 따야 더 달고 맛있는 법이다.》
이것은 수십년동안의 영화배우생활을 해온 그의 좌우명이다.
관객들은 그가 창조한 진실하고 개성적인 연기를 안받침하는 세련된 화술과 역인물형상에 대한 풍부한 체험, 깊은 탐구와 피타는 노력의 대가라는것을 다는 알지 못한다.
1970년대말의 어느 여름날이였다.
그날 저녁 황영일은 갑자기 안해를 찾았다.
《여보, 좀 오우.》
《왜 그러시우?》
맏며느리와 함께 부엌에서 동자질을 하고있던 그의 안해 차천명은 남편이 침실겸 연기훈련실로 쓰고있는 방으로 다가갔다.
《아, 빨리 오라는데.》
원래 성미가 느긋하고 침착한 남편이 재촉하는것을 보면 급한 일이 생긴 모양이였다.
영문을 몰라하며 방문을 열고 들어서던 안해는 깜짝 놀랐다.
그처럼 인정많던 남편이 무섭게 노려보고있었던것이다.
안해는 자신도 영화배우이니만치 웬간한 연기훈련에 습관되였지만 오늘은 여느때와 달랐다.
흡사 병아리를 덮치는 독수리같은 표정을 보니 지금껏 동거동락해온 부부간의 정이 싹 떨어지는것 같았다.
안해는 저도 모르게 뒤걸음쳤다.
다음순간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사납던 남편의 표정이 스르르 무너지더니 교활한 인상으로 바뀌는것이 아닌가.
도대체 영문을 알수 없었다.
《내 지금 이등박문놈이 <을사5조약>을 날조하는 장면을 련습하는중이요.》
남편의 말에 안해는 억이 막혀 말이 나가지 않았다.
아무리 연기가 중하다고 해도 너무한것 같았다.
하기야 오직 영화밖에 모르는 남편이였다.
며칠전 남편은 당시로서는 보기 힘든 경대를 세개나 사왔다.
안해는 집살림에 전혀 낯을 돌리지 않던 남편이 오랜만에 며느리를 생각해서 거울을 사왔다고 기뻐하였다.
그런데 남편은 거울들을 모두 제 방으로 들여가더니 세벽을 따라 주런이 세워놓는것이였다.
무엇때문에 그러는가고 묻자 남편의 대답이 걸작이였다.
《연기를 립체적으로 비쳐보자는거요.》
필경 오늘 자기를 놀래웠던 이등박문의 연기도 그 보배거울의 덕일것이다. …
남편이 또다시 찾았다.
《차꽃분동무!》
본시 얌전하고 마음착한 안해는 조선2. 8예술영화촬영소에서 《차꽃분》이로 통하고있었다.
《…》
《뭘 그러오, 차꽃분동무!》
안해는 한숨을 조용히 내그었다.
아무래도 난 속대가 약한 녀자다. 방금전까지 앵돌아졌댔는데 그 한마디 부름말에 마음이 스르르 풀어지다니…
남편은 애원하다싶이 부탁하였다.
《한번만 더 봐주오. 래일 촬영을 해야 하오.》
촬영!
그 말은 거짓말처럼 신비한 효력을 나타냈다.
얼굴이 밝아진 차꽃분은 구석에 놓인 걸상을 끄당겨놓고 앉았다.
《그럼 어디 해보시라구요.》
그리하여 부부간에 이등박문의 연기형상을 두고 훈련이 벌어졌다.
저녁식사가 늦어져 걱정하던 맏며느리 원숙은 연기의 세계에 깊숙이 빠져버린 그들을 보자 손등으로 입을 가리우며 웃었다.
그날 황영일의 집창가에서는 동녘하늘이 훤히 밝을 때까지 불빛이 꺼지지 않았다. …
그로부터 며칠후 황영일의 개화장이 갑자기 없어졌다.
그 개화장은 그가 이등박문의 걸음새를 형상하기 위해 일부러 구해온것이였다.
황영일은 여기저기 찾아다녔지만 개화장은 종시 나타나지 않았다.
동료들은 이때라고 여겼는지 개화장없이 이등박문의 걸음새를 연기해보라고 하였다.
황영일은 안된다고 뻗치였으나 그냥 성화를 먹이자 마지못해 응하였다.
그런데 일부러 그러는지 아니면 정말 그러는지 이등박문의 거드름스럽던 걸음새는 사라지고 촌늙은이의 걸음새가 나타났다.
황영일은 제법 한탄조로 토설하였다.
《개화장이 없으니 안되겠소.》
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개화장이 불쑥 나타났다.
황영일은 그럴줄 알았다는듯 씩 웃으며 개화장을 받아들었다.
비로소 그에게 속았다는것을 안 동료들은 이번에는 진짜 연기를 해보라고 성화먹였다.
그러자 황영일은 보란듯이 개화장에 몸을 싣고 거드름스럽게 걷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 걸음새에 조선사람들을 깔보는 이등박문의 오만하고 포악한 기질이 방불하게 재현되였던것이다.
그야말로 작중인물의 성격을 잘 살린 연기였다.
그의 피타는 노력에 대하여 인민배우 신명욱은 이렇게 회상하였다.
《예술영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를 촬영할 때였습니다.
그때 우리는 짬만 있으면 황영일동지가 거울앞에 마주 앉아 여러가지 표정을 바꾸어가면서 련습하는것을 자주 보군 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역인물에 맞는 독특한 화술을 창조하기 위하여 자기의 고유한 우렁우렁한 남성적인 목소리를 거센 목소리로 바꾸어가면서 훈련하는것을 보았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황영일동지, 그만하면 연기형상이 완성된것 같은데 너무 무리하지 않습니까.> 하고 만류하군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장군님께서 자기의 미숙한 분장형상까지 완성시켜주시면서 력사인물창조에서는 자그마한 세부형상까지도 그 시대의 전모가 비낄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고 하시였는데 그 뜻에 비하면 아직 멀었다고 하면서 밤낮이 따로없는 련습을 진행하였습니다.
이렇듯 황영일동지는 위대한 장군님의 탁월한 지도와 그이께서 보내주신 력사자료, 사진자료에 기초하여 과학적인 형상방도를 세우고 포악한 기질과 위협공갈, 사기협잡과 회유기만으로 꽉 차있는 교활한 이등박문의 량면적인 성격을 잘 살릴수 있었습니다.》
황영일이 이등박문의 연기형상을 완성하기 위하여 기울인 노력을 다 이야기하자면 끝이 없다.
그중에서 오늘도 전해지고있는 한가지 일화만은 소개하려고 한다.
하루는 황영일의 집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가장이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진것이였다.
안해와 자식들이 떨쳐나섰으나 종적을 찾을길 없었다.
그 시각 황영일은 중앙동물원정문에 서있었다.
《이보시우, 오늘이 휴식일이라구 몇번이나 말해야 알겠소?》
돋보기를 낀 늙수그레한 경비원은 자기앞에 서있는 남자가 영화배우인줄은 모르고있었다.
이런 때 다른 영화배우 같으면 어떻게 처신했을가?
모름지기 《전 예술영화 <보이지 않는 요새>에서 구장역을 한 배우입니다.》하고 점잖게 튕겨주었을것이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황영일은 자기가 영화배우라는것을 나타내기 싫어하였다.
길거리를 갈 때에는 고개를 수굿하고 걸었고 뻐스에 오르면 창밖을 덤덤히 내다보군 하였다.
그 고지식한 성미때문에 그는 한시간째 중앙동물원앞에 서있는것이였다.
끝내 경비원이 손을 들고말았다.
《손님, 대체 뭘 보려고 그러우?》
그제야 빗장을 지른것 같던 황영일의 두툼한 입술이 벙싯 열렸다.
《거부기를 보자고 그럽니다.》
《거부기라구요?》
경비원은 어이없어하였다.
한시간나마 기다린 손님의 관심대상이 고작 거부기라고 하니 그럴수밖에 없었다.
그때 한 처녀가 옆으로 지나가고있었다.
《성애야, 글쎄 이 손님이 널 찾아왔다누나.》
희고 갸름한 얼굴의 처녀가 의문어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절 찾아오셨나요?》
경비원이 얼른 시정했다.
《아니, 실은 네 거부기를 보려고 왔단다.》
《어쩌나!》
처녀의 얼굴에 안타까운 빛이 떠올랐다.
《전 어디 급히 가는 길인데요.》
여기까지 말하던 처녀의 얼굴이 별안간 환해졌다.
《아이, 예술영화 <보이지 않는 요새>에서 구장역을 한…》
그제서야 황영일을 알아본 경비원은 몹시 미안해하였다.
《어이구, 내가 눈이 어두워 영화배우도 몰라봤군요.》
황영일은 오히려 제편에서 사과하였다.
《아닙니다. 제 사정만 생각하면서… 미안합니다.》
얼마후 적괴수의 성격탐구를 위해 찾아왔다는것을 안 사양공처녀는 영화배우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서 가시자요. … 걱정마세요. 거긴 다른 동무를 보내겠어요.》
이렇게 되여 황영일은 중앙동물원 거부기사에 들어갔다.
그는 처녀의 설명을 들으며 거부기를 유심히 관찰하였다.
《처녀동무, 저놈이 혹시 죽은게 아니요?》
처녀는 까르르 웃었다.
《아이참, 죽다니요.》
처녀는 거부기등을 손으로 살짝 건드렸다.
그래도 그놈은 움쩍하지 않았다.
《어마나, 이 엉큼한 놈 봐.》
처녀는 먹이통에 담겨있던 달팽이를 거부기앞에 살그머니 놓아주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죽은듯이 잠잠하던 거부기란 놈은 갑속에 틀어박았던 목을 길게 뽑더니 어느 틈에 먹이감을 덮쳤던것이다.
처녀는 다른 달팽이를 일부러 거부기와 떨어진 구석에 놓아주었다.
거부기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천천히 먹이감으로 다가갔다.
위험을 깨달은 달팽이는 조가비속에 만문한 살을 깊숙이 파묻었다.
거부기는 긴 대가리로 먹이감을 슬슬 뒤집다가 약한 곳을 발견하자 여유있는 동작으로 닁큼 삼켜버렸다.
정말 흉칙한 놈이였다.
《처녀동무, 가만!》
좀해서 덤비지 않는 황영일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다시 보기요.》
처녀는 처음과 같은 방법으로 먹이감을 주었다.
역시 거부기는 한번 마음먹으면 수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먹이감을 삼키는 《흉물스럽고 포악한》 동물이였다.
황영일의 입가에 만족한 웃음발이 어리였다.
드디여 적장의 음흉하고 포악한 성격을 찾은것이다.
집에 돌아온 황영일은 어리둥절해하는 가족들앞을 지나 곧추 《연기련습실》로 들어가더니 보배거울앞에서 연기훈련을 시작하였다. …
황영일은 자기가 가꾸는 과일나무가운데 혹시 작은 열매가 달려있다고 해도 버리지 않고 소중히 키우는 성실한 인간이였다.
1971년 2월에 평양대극장에서는 위대한 장군님의 지도밑에 주체적문예사상연구모임이 진행되였다.
그날 황영일은 예술영화 《36호의 보고》창조경험을 두고 토론을 하였는데 여기에서 그는 단역을 홀시하지 말데 대하여 주장하였다.
장군님께서는 배우동무가 단역을 홀시하지 말데 대한 좋은 의견을 내놓았다고, 앞으로 창작가, 예술인들이 단역을 홀시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현상에 대해서는 제때에 강한 투쟁을 벌려야 하겠다고 하시며 그의 의견을 적극 지지해주시였다.
장군님의 말씀에서 큰 힘을 얻은 황영일은 설사 단역이라고 해도 책임적으로 형상하였고 사소한 세부나 대사도 놓치지 않았다.
그에 대하여 공훈배우 김찬민은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제가 예술영화 <보이지 않는 요새>를 촬영할 때 체험한 사실입니다.
그때 황영일동지는 구장역을 맡아하였습니다.
영화에는 구장이 주인공 광진이가 유격대공작원이라는것을 알고 놀라서 일제경찰에 신고하려다가 귀뺨맞는 장면이 있습니다.
원래 영화문학에는 이 대목에서 <유격대원을 숨겨두었다가 온 마을이 참상을 당하게 할수 없지 않는가?> 하고 제 심정을 토로하며 두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두드리는것으로 되여있었습니다.
그런데 황영일동지는 오히려 주먹을 높이 들었다가 맥없이 가슴을 두드리는것으로 형상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니 제딴에는 마을사람들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원쑤 일제와 맞서싸울 대신 오히려 예속과 굴종의 울타리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역인물의 성격이 실감있게 살아나는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린 촬영이 끝난 후 그에게 어떻게 그처럼 기발한 형상을 창조할수 있었는가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황영일동지는 단역이라도 주역처럼 생각하고 진지하게 탐구하면 진실한 연기가 나올수 있다고 하는것이였습니다.》
하루는 그가 영화문학작가를 찾아갔다.
황영일은 밤깊도록 연구한 연출대본을 펼쳐보이며 여기에서는 대사가 이렇게 되여야 역인물의 성격을 살릴수 있다고 제기하였다.
작가는 쉽게 응하지 않았다. 대본대로 하라는 요구였다.
다른 배우 같으면 중뿔나게 나섰다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갔을것이다.
그러나 황영일은 물러서지 않고 작가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는 밤깊도록 작가와 론쟁하였는데 상대방을 설복한것은 물론이고 그집 안주인이 성의껏 차려준 저녁식사까지 대접받고 기분이 좋아서 돌아왔다.
다음날 그 대사를 들은 창작가들은 정말 잘되였다고 이구동성으로 평하였다.
소원과 계승
관록있는 인민배우로 자라난 황영일이였지만 가슴속에 늘 한가지 걱정을 안고있었다.
그것은 자기의 뒤를 이어 영화배우로 될 자식이 없는것이였다.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아버지처럼 좋은 목청과 영화배우적인 소질을 타고나지 못하였던것이다.
황영일은 맏아들 황승룡한테 혹시나 하고 기대를 걸었었다.
그러나 그가 기록영화촬영소 조명사로 방향전환을 하는 바람에 고배의 잔을 마시지 않으면 안되였다.
당시 적지 않은 로배우들은 자기의 대를 잇는다면서 자식들을 무작정 대학에 보내려고 하였었다.
황영일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천성적인 재능이 없으면 배우가 될수 없다는것을 알고있었다.
그러니만치 배우적소질이 없는 자식을 대학에 보내는것은 작게는 자신을 속이고 크게는 나라와 인민을 속이는 행동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랬으나 가슴속에 앙금처럼 자리잡고있는 욕망은 털어버릴수 없었다.
어느 일요일 화목한 분위기가 흐르던 그의 가정에서 때아닌 우뢰소리가 터져나왔다.
《뭐, 재단사라구? … 안된다!》
사연인즉 맏아들이 재단사처녀와 선을 보았는데 황영일은 배우가 아닌 며느리는 못들어온다고 으름장을 놓았던것이다.
사실 황영일은 며느리감에게 마지막기대를 걸고있었다.
그동안 맏아들은 녀배우들과 여러번 선을 보았지만 가장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때문에 은근히 속을 쓰는 판에 생뚱같은 재단사말이 나오자 화가 난것이였다.
그후 맏아들이 끝내 재단사처녀와 결혼하게 되였다는 사실을 안 황영일은 며칠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새며느리 원숙은 어쨌으면 좋을지 몰라하였다.
어느 겨울날 황영일은 저녁늦게까지 콩나물콩을 고르고있는 며느리를 보았다.
처음은 그런가부다 했는데 밤늦게까지 연기훈련을 하다가 전실에 나와보니 나무받침대를 건너댄 큰 물그릇우에 콩나물시루가 얌전히 올라앉아있었다.
뒤에서 안해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글쎄 며늘애가 당신의 당뇨병치료에 콩이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친정집에 가서 얻어왔다지 않아요.》
황영일은 쓰다달다 말이 없었다. …
며느리는 콩나물기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직장에서 퇴근하면 먼저 손을 깨끗이 씻고 콩나물에 물을 주었고 한겨울에 온도를 보장하기 위해 시집올 때 가져온 새 담요를 콩나물시루우에 덮어놓았다.
황영일은 안해에게 며느리가 콩나물에 물을 줄 때 왜 매번 손을 씻는가고 물었다.
안해는 웃으면서 콩나물에 기름기가 들어가 썩을가봐 그런다고 알려주는것이였다.
황영일은 며느리를 대하기가 좀 거북해졌다.
하루는 한밤중에 아들, 며느리가 자는 방에서 따르릉-하는 탁상시계종소리가 났다.
이윽고 전실에서 나직한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해서 슬며시 문을 열어보니 며느리가 콩나물시루에 정성껏 물을 주고있었다.
저도 모르게 코마루가 시큰해왔다.
자기가 그렇게 푸대접을 했지만 며느리는 시아버지병을 고쳐주겠다고 저렇듯 극성이 아닌가.
(내가 너무했어.)
그날부터 황영일의 태도는 느긋해졌다.
몇달후 그는 보기에도 시큼한 살구를 한줌이나 따가지고 왔다.
안해는 무뚝뚝하던 령감이 이제야 로친 귀한줄 안다고 하면서 살구 한알을 깨물었다.
그때 남편이 벼락같이 소리쳤다.
《그게 뭐 당신 먹으라고 가져온건줄 알아?》
《아니 그럼? …》
《며느리가 입쓰리하는것 같애서 가져왔단 말이요.》
안해는 질투가 나기도 하고 한편 기쁘기도 해서 두눈을 크게 떴다.
《여보, 어떻게 된 일이요?》
황영일은 시치미를 뚝 따고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 며늘애가 총각애든 처녀애든 뭘 낳겠지?》
《그야 그렇지요.》
《난 말이요. 그애를 잘 키워서 배우로 만들 생각이요.》
안해는 혀를 찼다.
《그러니 당신 아직두 그 꿈을 버리지 않았구려.》
《아무렴, 내 그래서 미리 지원을 하는거요. 허허허.》
그때 마침 며느리가 퇴근해오자 황영일은 《으험!》 하고 헛기침을 깇고는 제 방으로 건너갔다.
그후 며느리는 귀여운 옥동녀를 낳았다.
손녀를 품에 안은 황영일은 자기의 뒤를 이을 예쁜 녀배우가 태여났다고 기뻐서 어쩔줄 몰라하였다.
그럴수록 그는 며느리를 더 귀해하고 아껴주었다. …
아마 황영일만큼 배우직업을 사랑한 사람도 흔치 않을것이다.
언제인가 의사가 황영일에게 담배를 끊지 않으면 목청이 변할수 있다고 주의를 주었다.
그때 그의 화술은 류창하고 세련되기로 소문났었다.
그 좋은 목청이 변한다는것은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였다.
《정말 담배를 끊을수 있수?》
담배질군인 남편을 잘 알고있는 안해의 걱정이였다.
황영일은 담배를 끊기 아쉬운듯 한동안 있다가 단호하게 대답하였다.
《끊겠소.》
실지 그는 담배를 끊었는데 그 방법이 아주 독특하였다.
황영일은 안해에게 부탁하여 코트의 한쪽주머니에 담배를 넣고 다른쪽 주머니에는 닦은 콩 한줌을 넣었다.
혼자서 있을 때는 그럭저럭 참을수 있었는데 곁에서 담배를 피우면 참기가 힘들었다.
견디다 못해 한쪽주머니속의 담배가치를 만지다가 손에 배인 담배냄새를 한참동안 맡고는 또 다른쪽 주머니의 닦은 콩을 꺼내 입에 넣군 하였다.
저녁에 안해가 남편의 코트주머니를 뒤지면 닦은 콩은 없고 얼마나 만졌는지 범벅투성이가 된 담배가 나타나군 하였다.
안해는 콩을 먹으니 당뇨병치료를 해서 좋고 또 담배를 피우지 않으니 목청이 변하지 않아 좋다고, 그야말로 일거량득이라면서 좋아하였다.
후날 맏아들이 어떻게 담배를 끊었는가고 묻자 황영일은 이렇게 말하였다.
《담배를 피우면 목청이 상한다. 아무리 담배가 좋다고 해도 영화하구야 못 바꾸지. 으험!》
어떤 사람들은 황영일이 오직 영화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알고보면 그는 인정도 많은 사람이였다.
그것은 그가 자기처럼 공화국으로 들어온 예술인들의 생활을 성의껏 도와준 사실이 말해주고있다.
1950년대 중구역 경림동에 있는 황영일의 집에서 영화배우 유경애가족과 남궁련가족이 여러해동안 동거살림을 한적이 있었다.
전후복구건설이 한창이여서 부득이 취한 조치였는데 그들을 대하는 황영일의 태도가 재미났다.
자식들을 셋이나 키우면서도 언제 한번 쌀걱정을 해본적없는 그가 웃방에 있는 유경애가족의 쌀걱정을 했고 겨울이 오자 안해가 꾸민 새 이불을 한번도 덮지 않고 그대로 가져다주었던것이다.
날이 가면 갈수록 커만 가는 행복속에서도 황영일은 남조선에서 겪은 일들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식들에게 연극을 하고싶어도 마음대로 할수 없었고 오히려 감옥에 끌려가 지긋지긋한 고문을 당하던 지난날에 대하여 이야기하군 하였다.
《래일이라도 조국이 통일되면 얼마나 좋겠니? 내 그럼 서울에 나가서 <다들 보시오. 이 황영일은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장군님의 품속에서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자랐소!>하고 큰소리를 칠테다.》
그러면서 그는 남조선에서 미처 꽃망울도 피우지 못한채 원쑤들에게 학살당한 두 자식이 지금 살아있다면 자기의 뒤를 이어 훌륭한 영화배우가 되였을것이라고 아쉬워하였다.
그렇게 인생말년을 보람차고 행복하게 보내던 황영일은 온 나라가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준비로 들끓고있던무렵 불치의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였다.
마지막순간이 닥쳐왔다는것을 안 황영일은 손시늉으로 일으켜달라고 하였다.
안해와 자식들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일어난 그는 위대한 장군님의 초상화를 하염없이 우러렀다.
두볼로는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아, 운명이란 무정하구나. 장군님의 대해같은 은덕에 보답하자고 했는데…)
눈앞으로 지나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자습으로 중학교과정을 독파하던 일, 한진섭을 비롯한 연극인들과 함께 극단을 설립하던 일, 해방후 남조선에서 새 조선의 연극을 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울이 해방되자 안해와 함께 인민군대군복을 입고 연극활동을 벌려가던 나날들…
그가운데서도 제일 잊혀지지 않는것은 위대한 장군님께서 영화예술인대오에서 떨어져나갈번 하였던 자기를 품에 안아주시고 온 나라가 다 아는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키워주시던 감격의 나날이였다.
자신이 걸어온 70평생이 결코 짧다고는 생각지 않은 그였으나 지금 이 순간에는 그 생이 살같이 흘러간것처럼 여겨졌다.
분했다. 그리고 죄스러웠다.
최후의 힘을 모은 황영일은 《위대한 장군님!》라고 목메여 부르고는 숨을 거두었다.
위인의 손길아래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자라나 인민의 사랑을 받던 인민배우 황영일은 이렇게 우리의 곁을 떠나갔다.
그가 사망하였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못내 애석해하시며 장례를 기관장으로 하고 신문들에 부고를 내도록 은정어린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생전에는 걸음걸음 손잡아주시고 사망한 후에는 영생하는 삶을 누리도록 보살펴주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숭고한 의리의 세계앞에 유가족과 친지들은 격정을 금치 못하였다.
행복한 땅에서는 훌륭한 계승이 이어지기마련이다.
고인이 그처럼 소원하던 배우가정의 대를 이은것은 그의 맏손녀 황련희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평양연극영화대학을 졸업한 그가 연극예술인대오에 설수 있도록 하여주시였던것이다.
뿐만아니라 2010년 4월 26일과 5월 8일 국립연극단에서 창조한 경희극 《산울림》을 보아주신 장군님께서는 덕실역을 맡아한 동무가 그전에 조선2. 8예술영화촬영소 배우였던 황영일동무의 손녀라는데 연기를 생동하게 잘한다고 높이 치하해주시였다.
그는 어떻게 할아버지의 대를 잇게 되였는가라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하였다.
《전 어릴때부터 할아버지한테서 배우이야기를 옛말처럼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래서 크면 꼭 배우가 되여 할아버지의 소원을 풀어드리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제가 할아버지의 대를 이을수 있도록 평양연극영화대학에서 공부하도록 하여주시였고 졸업후에는 국립연극단에서 마음껏 재능을 꽃피우도록 해주시였습니다.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께서는 어제날 위대한 장군님께 기쁨드린 인민배우 황영일의 손녀답게 제가 훌륭한 연극배우로 성장하도록 걸음걸음 이끌어주시였습니다.
우리 할아버지의 소원을 풀어주신 은인은 위대한 장군님과 경애하는 원수님이십니다.》
오늘도 그는 위대한 장군님을 높은 연기실력으로 받든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애하는 원수님을 연극예술로 받들 일념을 안고 불타는 창조의 낮과 밤을 보내고있다.
인민배우 황영일!
그는 위대한 스승의 슬하에서 창조의 최전성기를 빛내인 행복한 영화예술인이였다.
조국과 인민의 추억속에 영생하는 인민배우 황영일의 한생은 우리 인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예술영화들에 새겨진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 《36호의 보고》, 《보이지 않는 요새》, 《검사는 말한다》 등에서의 인상깊은 장면들과 더불어 영화예술의 화폭속에 길이 남아있을것이다. <저작권자 ⓒ 프레스아리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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